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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일상화된 폭력과 타인, 식물성
채식주의자, 일상화된 폭력과 타인, 식물성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6.09.0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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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트라우마 때문에 육식을 거부하다 채식마저 거부하고 결국은 나무가 되고 싶은 여자 영혜 이야기다. 폭력의 야만성과 타인에 대한 이해 부재 사회를 극단적인 서사로 고발한다.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몰이해, 이해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넘어서, 동일화와 일색화를 강요하는 우리안의 폭력까지 들여다보게 한다. 식물로 돌아가 다시 피어나고 싶은 것, 몽고반점이 상징하는 푸른 점처럼 근원으로, 식물성의 평화로 돌아가야한다고 말한다. 식욕의 폭력성을 통해 폭력적인 사회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혜가 9살 때 자신의 다리를 물은 개를 아버지는 오토바이에 매달아 죽을 때까지 달린후 말그대로 개패듯이 패죽인다. 그 고기를 자신이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트라우마가 됐다. 월남전 참전용사인 아버지는 폭력의 화신이다. 어린 영혜를 상시적으로 팼다. 어른이 된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자 아버지는 강제로 고기를 먹이며 또 때렸다. 영혜는 손목을 그었다. 남편도 가족도 의사도 영혜를 모르고 이해하지 못한다. 육식-채식-거식을 거쳐 식물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의 고통을 보여준다.

고기를 안먹어요. 하면 네 그렇군요. 저는 맨발로 걸어요. 저는 노브라예요. 그렇구나 하면 될 것을. 왜 왜 왜 묻고 토를 달고 수군거리고 동일하기를 강요하는가. 강제로 고기를 먹이려는 아버지처럼. 저는 낚시를 싫어해요. 저는 골프를 안해요. 네 그렇군요. 하면 될 것을. 남의 취향이나 삶의 태도에 대해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좀 내버려두라고. 좀 다른 사람도 있구나 하면 해결될 문제다. 문제도 아닌 것이다. 왼손으로는 밥 먹지 마라. 왼손으로 글 쓰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전근대 아버지들의 세계다. 다른 것, 소수자에 대한 폭력은 문화가 됐다. 그 지점에 ‘채식주의자’는 있다.

육식을 강요하는 부모와 남편, 이해 못하는 자매까지 모두 철저한 타인이거나 적이다. 창작열에 불타는 비디오 아티스트, 형부만이 영혜를 조금 이해하는 듯하나, 그는 예술적 욕망을 실현하기위해 영혜를 이용하는,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정신병원에 들어온 중년여성의 말은 우리사회 중산층 일반의 말이나 진배없다. “나 이민 갈 거야. 너희 같은 것들하고 하루도 더 못 지내” 이해불가 소통불가의 타인들로 둘러쌓인 곳은 정신병동 아닌 곳이 없다.
우리는 타인을 감옥이나 정신병동에 가두는 존재다. 실제로 감옥에 쳐넣는 경우도 있지만, 무관심과 몰이해와 동일화, 일색화를 강요하는, 일상화된 폭력은 정신병동에 가두는 것과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아직 괜찮은 거야”
폭력과 동물성, 죽음, 붉은 피로 상징되는 남성의 세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식물성 여성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꽃과 나무와 숲, 푸른 이미지로 표상되는 식물성, 여성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소설은 부드러운 곡선, 둥글고 휜, 암컷의 철학, 노장을 옹호한다. 장자의 꿈 모티브가 활용되고 있다. 영혜는 꿈 때문에 채식, 거식을 거쳐 식물이 되어간다. 맨 마지막 부분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이라는 서술은 한바탕 꿈을 건너 새세상에 대한 가느다란 희망을 담고 있다.
'마치 수도승처럼 담담하고 적막해 보일만큼 그 안을 들여다 볼수 없다. 기이한 덧없음, 어느 상황에서도 평정을 지키는 모습'은 장자에 나오는 성인의 모습에 가깝다. 영혜는 온몸에 꽃과 식물과 나무 이파리를 그린 후 악몽을 꾸지 않는다. 마음과 몸의 평정을 찾은 것이다.
‘일체의 군더더기가 제거된 육체, 모든 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는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로 묘사된다. 그 존재는 장자가 말하는 성인의 경지를 연상시킨다. ‘텅빈 두 눈’과 ‘본질적인 어떤 영원한 것을 상기시키는 침묵의 조화’도 마찬가지다.
장자 응제왕편의 무하유지향을 연상시킨다. ‘먼저 네 마음을 담박한데 두고 형체와 기운을 적막한 세계에 합치시키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사심을 버린 곳’은 곧 문명이 떠나온 근원, 몽고반점의 원시세계다.
지배이데올로기 그 자체, 월남전 참전용사인 아버지, 폭력의 결과물인 육식에 대한 거부, 육식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채식과 식물성으로 돌아가려는 영혜. 그 되돌아감이 노자의 귀/돌아감에 닿는다. 노자는 역설적이게도 어떤 완숙한 단계를 갓난아기에 비유한다. 부드러운 것, 욕망이 제거된 상태다. 영혜는 점점 퇴행해 아기가 되어가려한다.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라는 말, 피흘려 싸우지도, 행하지도 않지만 묵묵히 서 있음으로써 행하는 나무,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는, 나무들 속에 나무처럼 서 있고, 물구나무서는 행위는 평화를 상징한다. 숲속은 사람을 평온하게 한다. 숲은 동물을 품는다. 곧 숲이 세계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영혜는 작은 새들이 숲으로 가듯 나무가 되고자 한다.
인류문명은 공격, 전쟁, 폭력, 진화, 성장, 배제의 동물성(남성성)이 구축해왔다. 그 결과가 야만의 현대다. 약육강식 동물성의 현대다. 이에 맞서 평화, 비폭력, 나눔, 이해, 배려의 식물성(여성성)도 가느다란 전통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동물성의 문명이 인류 자신 뿐아니라 자신의 존재기반인 세계까지 파탄 냈다. 비폭력 식물성이 구원의 오솔길이 될 수 있을까? 우울하지만 영혜는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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