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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양심의 도화선' 이선관의 시세계
'시인은 양심의 도화선' 이선관의 시세계
  • 원종태 기자
  • 승인 2016.02.24 1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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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관의 시세계와 지역문학(경남민예총 제6집, 2015.12) 원종태 

2015.10 이선관 시전집
정치와 경제의 중앙 집중현상이 가속화되듯 문학을 비롯한 예술분야도 마찬가지다. 생활문화 공동체로서 각각 지역이 평등한 공간적 의미를 가지는 ‘지역’은 갈수록 황폐화되고 중앙의 아래 개념인 ‘지방’은 ‘변방’으로 더욱 밀려나고 있다. 속도와 물류의 총아인 도로와 철도는 지방의 인적 물적 자원 모든 것을 흡수해가는 빨대에 다름 아니다. 예산, 교육, 행정, 문화 기관이 집중돼 있는 서울이 아니면 문학이 유통되기 힘들다. ‘말은 나면 제주도로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에 고개 끄덕이지 않는 사람이 없다. ‘큰 물에서 놀아야 된다’도 같은 말이다. 몸은 여기 있으되 마음은 중앙에 있거나 중앙에 빼앗긴지 오래다. 지역에서 문예를 한다는 것은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한 낙오자의 몸부림쯤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문예가 지역의 독자성을 갖고 ‘지역문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역에서 먹고 사는 문제해결이 선행돼야 한다. 그에 앞서 놀이터나 광장이 많아야한다. 놀이터와 광장은 문예작품의 발표지면, 유통시장을 은유한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경남에 문학단체 기관지 이외에 독자적인 문예전문지가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있다하더라도 필진 구하기도 어려울 것이며, 문예지를 구매할 독자는 물론, 문예지를 지원할 자치단체나 기업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원고료 받는 시인 작가는 얼마나 되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높은 예술성과 대중성, 수준 높은 지역문학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가혹하다. 자기실현이든 사명감이든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지역문학인들은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끼리라도 독려하며 존중해야한다.

지역문학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선관 시인은 마산의 지역성을 문학적으로 대표하는 시인으로 평가할 만하다. 스스로도 그러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 시인은 ‘몸’이 가진 한계로 인해 평생을 마산 창동 500m 반경안에서 생활하고 시를 쓰면서 마산지역에서 인류보편의 세계성을 발견한 시인이다.

 

*이선관 시인(경남도민일보 자료사진)
어눌한 말투, 큰 키에 휘청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창동허새비(허수아비)로 불렸던 이선관.(1942-2005)

1942년 서울 출생해 마산으로 이주한 이후 평생을 고향 마산에서 활동하다 2005년 12월 14일 지병으로 작고했다. 마산시민문화예술인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졌다. 69년 첫시집 <<기형의 노래>>이후 12권의 시집을 펴냈으며, 1권의 유고시집이 있다. 통일문학공로상, 교보환경문화상 마산시문화상 녹색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생후 얼마 안돼 백일해 치료를 위해 먹은 약 때문에 뇌성마비에 걸려 평생 장애인으로 살았다. 60년 창신고 3년 때 마산 3.15의거 시위에 참여했다. 3.15는 시인에게 ‘기형’의 몸과 함께 그을 존재하게 한 영원한 시적 주제였다.

71년 진보적매체인 <<씨ᄋᆞᆯ의 소리>>에 박정희 독재를 비판하는 시 <애국자>와 <헌법 제1조>를 발표했다. 최초의 환경시로 평가받는 <독수대> 연작시를 비롯해 <체르노빌>연작시 등 시대를 앞서간 문제작들을 세상에 발표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자문위원, 장애인문인협회 자문위원 민예총경남지부 고문 등을 역임했다.

75년 마산만 환경오염을 고발한 <독수대>를 발표했다. <독수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시로 꼽힌다. 마산 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 개발로 인한 마산 앞바다의 오염을 고발했다는 것이 빌미가 돼 ‘조국근대화를 저해하는 인물’이라하여 중앙정보부에 시집을 회수당하고 잡혀가기도 하면서 고초를 겪었다한다.

시인의 시 <선구자>에 따르면 아동문학가 이오덕 선생은 생전에 “어쩜 이런 몸에서 그런 강한 글이 나옵니까”라고 말했다한다. 시인의 진면목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다.


마산이 낳은 이선관 시인 

*마산 창동 예술의 거리에 있는 이선관 시인의 유품 전시관.

  
기형을 극복하고 인간을 선언하다 

‘강한 글’을 쓴 이 시인이 처음부터 강했던 것은 아니다.

69년 간행된 첫 시집 <<기형의 노래>>는 장애를 안고 있는 젊은 시인의 자의식이 중심적으로 드러나 있다. 기형에서 오는 소외의식에서 그의 시는 출발했다. 시집 기형의 노래 전편에 흐르는 정서이면서 그 극복의지를 보여준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시다. 

바늘귀에 실을 뀌는데/1분33초 걸렸다/ 완전한 육체를 상실한 미래의의 장벽으로/한가슴에 논다는 감정을 달래면서<나를 위한 시>

유서를 쓰지못해 자살하지 못하는/어느 정신 박약아도/끝내는 그리로 가는 것이다<건널목> 죽어있는 송장이 되지않기 위해/살아있는 송장이 되지않기 위해서/이렇게 살고 싶지않다/저렇게 죽고 싶지 않다<기형의노래>

73년 두 번 째 시집 <<인간선언>>에서부터 77년 세 번째 시집 <<독수대>>, 83년 <<보통시민>>등을 내 놓으며 현실의 모순과 독재 권력에 대한 풍자와 휴머니즘, 생명, 환경 통일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의 시적 세계를 본격적으로 열어간다.

<<인간선언>> 후기에서 그의 시관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예술적으로 승화된 작품이 요구되는 시대라기보다 더 근본적인 무엇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란 것을. 나는 시인이 아니다. 다만 비인간화를 촉진시키는 일절의 것에 대해 단호히 반격하려는 작은 몸부림의 소산이라 하면 된다”고 말한다. 시는 비인간화에 맞서는 몸부림이며 인간선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서를 써놓고 집을 나가고 병적인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해 가출하기도 했던 시인은 ‘장애자를 낳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건강한 첫아이 낳고 열등감에서 해방됐’(어머니14)으며 ‘분수대로 평범하게 보통사람으로 살자’고 다짐한다. ‘건강한 첫아이 출산’과 시집 <<인간선언>> 출판은 시인이 열등감에서 해방되면서 시적 변화를 가져온 시점과 일치한다.

세 번째 시집 <<독수대>>후기를 보면 시인의 시적 방향을 더욱 명확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의 임무는 그릇됨에 불 밝히는 것, 시인은 양심의 도화선이 돼야한다”고 선언한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들은 <애국자>, <헌법제일조>, <침묵세대>연작시,<침묵시위> 등이 있다. <침묵시위>는 성대를 잃어버린 개의 비유를 통해 재갈물린 억압적인 상황을 풍자했다. 이 시는 시인이 어느 시집에서 밝힌 대로 “당국에 의해 수거되어 찢겨지고 폐기처분”되는 수모를 겪었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풍자 그리고 저항시들이 주로 생산되는데 그 방식은 풍자적이다. 

빛이/어둠을 사르는/ 이른 새벽이었다.//문틈에선가,/ 창틈에선가,/ 벽틈에 선가,/ 나의 침실 깊숙이 파고드는// 동포여!/ 하는 소리에 매력을 느끼다가/ 다시 한번 귀 기울여 들어보니// 똥퍼여?/ 하는 소리라/ 나는 두 번째 깊은 잠에 취해버렸다.<애국자> 

<애국자>는 한국적 민주주의, 산업화, 민족중흥의 이름으로, 애국주의로 포장한 박정희 유신정권의 위선을 고발한다. ‘동포여’는 ‘똥퍼여’에 다름아니다라며 가짜 이데올로기를 신랄하게 풍자한다.

‘나는 초지일관이라고 말하면 당신은 좆이일관으로 듣는다.’ 불통에 대한 풍자다. 그 자신 어눌한 발음에 따른 불통의 경험이 확장된 경우다. 그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시다. 시 <애국자>에서 ‘동포여’라는 말이 ‘똥퍼여’하고 들린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엇먹어라 엇먹어라>는 시 역시 ‘엿먹어라 엿먹어라’다. 어눌한 말투 때문에 소통이 어려운 자신의 상황을 세계로 확대시킨 경우다. 그 였기에 가능한 시적 방법론으로 볼 수 있다.

시집 <<인간선언>>에는 유신체제를 비판 풍자하는 <헌법제일조>가 실려있는데 시인은 술김에 객기가 나서 시집 한권을 봉투에 넣어서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앞’으로 보냈다. 비서실장에게서 대통령에게 잘 전달했고, 앞으로 좋은 시를 많이 쓰라‘는 답신을 받았다는 일화도 있다. 단순한 기행을 넘어서는 결기를 보여주는 일단이다.

정권비판 시와 행동으로 인해 시인은 많은 고초를 겪었다. 시인은 <나 이선관은 불사조다>시에서‘칠십년 초에는/시골에 사는 병신이라/별 문제 없다고 보고를 하여/살아났다/팔십년초에는/몸이 많이 망가진 놈이/시골에서 글이나 끄적꾸적거리는/허새비 삼촌이라고 보고를 하여/살아났다/구십년 초에는/장애인이라고 좀 봐주는 바람에(봐주긴 무엇을 봐 주었단 말인가)/살아났다’고 직접 표현하고 있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시인의 풍자는 정치권만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서라/다친다/소주나까자//잠깐만, 우리 약속을 하자/뒤돌아 보기 없기다/좌우로 살피기 없기다//뒤돌아보는 증상이/좌우로 살피는 증상이/전염병처럼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아서라/다친다/소주나 까자 <소인들>

 시인들이여! /소중히 지니고 있는 백기를/버리고 시를 쓰지 않으렵니까?<근황>

처럼 눈치만 살피는 소시민들과 시인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시라 불리는 <독수대>를 세상에 내놓으면 큰 반향을 불러왔다.

바다에서/둔탁한 소리가 난다/이따이 이따이/설익은 과일은 우박처럼 떨어져 내린다/이따이 이따이/새벽잠을 설친 시민들의/눈꺼풀은 아직 열리지 않는다/이다리 이따이‘ 비에 적은 현숙막은 바람을 마시며 춤춘다/이따이이따이/아아/바다의 유언 이따이이다이<독수대>

구모룡 교수는 “독수대는 생명권 정치학은 근대적인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지구 생태계가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인식을 어느 누구보다 먼저 이선관이 하고 있다. 이선관 생명문학의 시발점이 된 시가 독수대”라며 시적 위상을 부여했다.

<독수대> 연작시와 <체르노빌> 연작시를 비롯해 생명과 환경시의 세계를 선구적으로 개척했다. <마산은 항구지만 바다는 없다>는 등이 실린 환경시집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가 대표적이다.

 여보야/이불 같이 덮자/춥다/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따뜻한 솜이불처럼 /왔으면 좋겠다

시인의 대표적인 통일시인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다. <이산가족 >연작시를 비롯해 혈육적 관점에서 통일을 노래한 많은 시를 생산했다.

 그는 천상 따뜻한 눈을 가진 휴머니즘 시인이다.

 너와 내가 공존하는/생존의 거리 창동네거리를 걸어가면/사랑하는 이웃은 물론 미워하는 이웃도/모두 사랑하겠다는 열정을/가져본다<창동네거리6> 

<어머니2>라는 시에서 천형이 된 내력을 소개해 두었다. 유아기 때 백일해에 걸렸는데 어머니가 탕약 반숟가락을 먹였는데 죽다 살아남아 지체부자유 목 못가누고 말 어눌하고 걸음 제대로 못 걷는 지체부자유로 평생을 살게 된 것이다.

포기하지 말 것이되 어느 정도의 체념이 살아가는데 필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동등하다. 인간과 신도 수평적 관계다. 아이 둘을 두고 떠나간 아내에게 씨발씨발 하다가도 건강한 아이를 낳아주었다는 그 하나만으로 고마운 마음이 일어난다고 표현하고 있다.

‘홍익재활원에 대녀와서’라는 부제가 붙은 <삶은 신앙입니다>에서 ‘뒤틀리지 말자/몸은 비록 뒤틀릴지라도/마음은 뒤틀리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삶의 의지에 대한 다짐이리라.

시인이 꿈꾸는 세상을 대단하지 않다. ‘스물다섯, 여섯 명이 모이는 미니교회/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빙 둘러앉아 얼굴을 마주보며/한 끼식사를 하는 그 모습이 보기 좋아/한지붕 밑에 옹기종기 모여/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이 좋아/정금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시 <정금교회>처럼 ‘얼굴 마주보며, 한지붕밑에 옹기종기 모여 음식을 나누어먹는’ 평화로운 삶일 뿐이다. 이같은 평화로운 삶, 소박한 삶을 위해 비인간적인 것들과 싸울 수 밖에 없고 ‘그릇됨에 불 밝’히는 시인이다.

79년 씨ᄋᆞᆯ의 소리에 <번개식당을 아시나요>를 발표했다. 이 시는 마산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의 삶을 사진처럼 찍어 기록한 시다.

 ‘누구는 공순이라 부르는데/그 지역 정문 아닌 후문에/정오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아동식 포장마차 대열/거기에 차려놓은/번개식당의 다양한 메뉴/1분 막국수 2분 짜장면 3분 김밥’.

근로자 노동자 기능공 산업전사 여종업원 여공 공순이라 불리던 우리들의 ‘누나’난 번개보다 빨리 줄을 서서 번개보다 빨리 점심을 먹고 번개보다 빨리 미싱을 돌리러 갔던 것이다. 자유의 이름으로 번개보다 빨리. 70년대 산업화라는 개발과 성장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 10대 20대 마산수출자유지역 ‘산업전사’ 여공들의 고단했던 삶과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있다. 수출자유지역의 역사가 아프게 화석화 돼 있다.

 경남문학의 세계화 ‘이선관문학상’제정 필요

 

 

누가 뭐래도 그는 마산이 낳은 시인이며, 창동 시인이다. 그의 시는 마산과 창동이 주무대이다.

마산에 대해 그는 각별했다. “지구촌의 중심인 대한민국, 대한민국 중심인 이 고장. 내가 태어난 이 고장이 중심이다하고 생각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이웃들에게 사랑하고 감사”하고 있다.

<마산은 마산사람이 주인이다>에서 끊임없이 마산이 가장 아름다웠던 때 3.15를 불러낸다.

시인 스스로 밝혔듯이 마산은 이 땅의 변방이 아니다. 60년 3.15의거 12열사를 ‘열 두제자’로 부르며, 열두 제자가 있는 한 마산은 이땅의 변방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마산이 대한민국의 중심이고 세계적인 장소다. 마산을 세계적인 장소이게 하는 그 중심에 시인 이선관이 있고 이선관의 시가 있다.

다시 의미 있는 도시가 된/이 고장의 자랑스러운 창동 네거리/그 십자로를 중심으로 하여/반경 오백미터는/당신의 영역이다//여기서 대어났는데/여기서 노래하다가/여기서 죽겠드는 다짐/그러니깐 반경 오백미터 이 거대한/영역은/당신의 무덤이다 부활이다//서울의 그 눈군가를/명독 백작이라 했던가/당신은 창동 공작이라 하던데//아니다 아니다/당신은 분명/창동 허새비다//봄에 되살아나/겨울 논두렁에 활활/불태워지는 활활 부활이다/마산, 그 창동의숨쉬는 허새비다. <마산 그 창동의 허새비>

시인은 마산 창동과 함께하는 불멸의 존재를 갈망하고 있다. 창동은 그의 영원한 육체적, 시적 고향이면서, 마산 창동의 문학을 세계의 문학으로 끌어올릴 곳이다. 그 스스로 창동 반경 오백미터 이내 공간이 전부라고 하듯, 창동은 곧 이선관이며 이선관의 시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이 선관 시인에 대해 “평생 뇌성마비를 앓고 극빈의 삶을 살았다. 비록 육신은 창동 반경 500미터 이내의 협소한 공간에 갖혀 살았으나 정신은 열려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 세계적인 시야의 원점은 4.19를 촉발시킨 3.15에 있다.”고 평했다.

배대화 교수도 “시와 삶은 통해 민주주의 생명, 통일을 줄기차게 추구했고, 강렬한 풍자와 해학으로 현실모순에 대한 비판과 성찰, 시학적 특성은 가벼움 쉬움 기록성이며 이선관 시 특유의 소통의 미학, 3.15와 10.18로 대별되는 근대 도시 마산의 문화적 정체성의 요체인 민주주의 정신을 상징하는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그의 시로 마산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고 창동은 불멸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고 말했다.

마산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은 3.15 정신이라는 세계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온몸으로 살다간 이선관 시인은 곧 3.15 정신의 마산과 연결된다. 그로 인해 마산은 세계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가 보여준 ‘마산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인식은 지역문학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이선관 시인 추모모임은 해마다 ‘창동허새비축제’를 열어 문학심포지엄으로 시인을 기리고 있으며, 창동에는 시인의 유품전시관이 시인을 기억하게 한다.

 지난 10월 말 이선관 시인을 기리는 제6회 창동허새비축제는 문학심포지엄과 집담회, 이선관 시전집 출판기념회 등이 열렸다. 출판기념회에는 추모모임 회원들과 유가족, 이 시인을 기억하는 많은 문학인, 예술가들이 참가했으며, 국회의원, 시장 등이 초청됐다.

<<이선관 시전집>>에는 이 시인의 시집 12권과 유고시집, 미발표 시 등이 수록됐는데, 950페이지로 두툼하다. 추모모임은 앞으로 이선관이 남긴 산문, 이선관에 대한 연구논문, 평문도 한자리에 모아 출판할 계획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마산의 소중한 문화적 유산인 이선관 시인을 기리는 ‘이선관 문학상’이 필요하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추모모임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 문학단체, 지역언론사 등이 함께 지혜를 모은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선관 문학상’으로 인해 제2,제3의 이선관이 탄생하고 지역문학이 활성화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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