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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 절개 후덕한 통제사 이응서 장군
청빈 절개 후덕한 통제사 이응서 장군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6.02.23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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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수군통제사 이응서 거사비(三道統制使李膺緖去思碑)>

이응서(李膺緖 1782~1865) 장군은 본관이 함평(咸平)으로, 그의 양부는 이유성(李儒成), 친부는 이유필(李儒弼)이다. 큰아들 이민상(李敏庠)이 경오(庚午) 1810년(순조 10) 출생, 작은 아들 이민리(李敏离)는 1814년(순조 14) 출생하여 모두 벼슬살이를 했다. 이응서는 1782년에 출생하여, 늦은 나이에 조선후기 학자인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생이 되어 학문을 연마했고, 1840년 갑자(甲子) 정시(庭試) 무과(武科) 급제하였다.

1843년 윤7월 9일 동래 수사(東萊水使), 1844년 3월17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1845년 6월15일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1849년 3월11일 황해도 병마절도사, 1851년 7월~1853년 6월까지 삼도수군통제사, 1853년 10월부터 약2년 간 우변 포도대장를 엮임하다가, 1855년 2월14일 행대호군(行大護軍)을 마지막으로 퇴직하여 향리에 머물다가 1865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년월일(年月日)은 모두 음력]
 

조선말기 학자이자 개화사상가인 강위(姜瑋 1820∼1884)가 임금(고종) 2년 을축년(乙丑年) 1865년에 통영을 방문하였다가, 마침 12년 전에 통제사로 근무했던 이응서(李膺緖) 장군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통제영에 들러, 통영 사람들의 지난 장군의 이야기와, 통제사 이응서 거사비(統制使李膺緖去思碑)를 다시 세우려는 통영 분들의 거사비 내용을 부탁 받았다. 그래서 통제영 內 보관 중이던 여러 자료들을 읽어 보고 느낀 소회와 이응서(李膺緖)를 칭송하는 송(頌)을 지었다.

180대 통제사 이응서(李膺緖 1782~1865)는 1851년 7월13일에 임명받고 8월초에 통제영으로 부임하였다. 약2년 후에 임기가 만료되었는데 1853년 6월1일 후임이 결정되고 그가 통영에 도착한 6월 15일경에 서울로 상경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종2품 외관직의 무관으로, 1593년 선조26년부터 1895년 고종32년까지 약 300년간 존치하였고 역대 208명의 수군통제사가 체임되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 제1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조선후기 태평한 시절에 변무(邊務)에 유의하여 공사(公事)에 힘을 쓴 사람은 근세에 이응서(李膺緖) 한 사람뿐이었다. 이응서는 70세의 나이로 그곳으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는 성곽을 쌓고 선박을 보수하는가 하면 총과 포를 제조하고 소금과 땔감을 저장하여, 흡사 산업을 경영하는 것과 같았고 늠름하게 적과 대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봉급도 공적인 일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고, 사직하고 돌아올 때도 그는 손에 채찍 하나만 들고 왔으므로 그곳 관리와 백성들은 지금도 그를 사모하고 있다.”
 

또한 강위(姜瑋)가 ‘이응서거사비(李膺緖去思碑)’를 대작(代作)한 글에서 모두 9가지 부분에서 그를 칭송하고 있다. ①공(公)의 연원(淵源)으로, 청빈한 생활에 힘써 절개를 지키며, 자상하고 온화하여 재물을 베풀었고 ②공(公)의 몸가짐인데, 첫새벽부터 사무를 보다가 깊은 밤에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군복을 벗지 않았으며 과감히 결단하고 지시하여 규정과 규칙을 제정하였다. ③공(公)의 말과 얼굴빛으로, 상벌(賞罰)에는 반드시 믿음성 있게 하고 자비와 위엄을 아울려 행하였다. 더하여 ④공(公)의 마음 씀씀이와 그릇을 언급했는데, 모든 일을 미리 계획하였고 교섭(交涉) 통상(通商) 사무(事務)를 몸소 행하고 병장기를 수선하여 준비해 놓고 소금과 숯도 미리 감추어 놓았다. 그 노력이 심히 근면하나 어떠한 포상도 바라지 않았다. ⑤그리고 재주와 지혜이다. 책임 있는 일은 여러 번 헤아려 보아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니 늘 쓰는 비용도 어긋나지 않았다. 또한 ⑥ 은혜로써 베푸는 정치였다.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돈의 융통이 어려우면 수미(需米)를 감가(減價)해 주었고 곡식이 귀하면 곳간을 풀어 안정을 시키는 등, 세금 공물 부역은 물론, 백성들의 온갖 어려움과 병폐를 개선하였다. 1865년 어느 날, ⑦ 이미 12년이나 지난 통제사 일인데 그의 죽음을 듣고 모두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의 지극히 어질고 후덕한 덕택(德澤)이다. ⑧공(公)의 한계(限界)로 자신이 처리하지 못하는 일에는 깊이 탄식하였고 이에 관청에서 거문고를 안고 검푸른 빛 나들이옷으로 단장하고 노래했다. 마지막으로 ⑨예악(禮樂)을 좋아하고 시서(詩書)를 숭상하여 강한루에서 교양 있는 풍류를 즐겼으니 공(公)의 덕행과 선행이다. 이로써 이응서 통제사는 모든 학식을 겸비한 장수로써, 위대하고 훌륭한 분이니, 만세(萬世)의 군자(君子)로 고(告)한다.

 

<삼도통제사 이응서 거사비(三道統制使李公(膺緖)去思碑)> (代作), 강위(姜瑋 1820∼1884).
아아! 철종 재위 2년 신해년(1851년) 우리 통제사 이공 응서(膺緖)가 통제사로 제수 받고 이 통제영(營)으로 와서 임금의 명을 받들어 3년 근무를 마쳤다. 장군이 관군민(官軍民)과 더불어 은혜를 베푸는 정치로 한평생을 다했으니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범상한 나무 주위에 높은 비석을 다섯 번 다듬어 온전히 언덕에 세웠다. 우리는 관청 좌우에 어른을 잘 모셨고 장막(帳幕) 아래 일찍이 존경하고 사모했던 바, 성인에 대해 칠십 제자가 승복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로써 오래도록 새겼으나 뭇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니 모두다 새로 바꾸어, 영구하도록 만들자하여 이윽고 옥돌로 만들어 세웠다. 이에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조정에서 우리의 영(營)이 3로(三路)의 요충지로써 남쪽 변방의 중요한 책임을 맡기었다.“ 필히 본디부터 저명하고 위세와 명망을 갖춘 귀중한 신하를 뽑아, 내외의 직임에 충실히 했으니, 여러 해 수고로운 공로를 무엇으로 보답하리오.

지금 임금(고종) 2년 을축년(乙丑年) 1865년, 대도독부로 승격되었다. 이름하여 ‘외관직 통제사‘인데 그들의 임무 수행이 크니 친히 이와 같이 우러러보았다. 고로 전후(前後)에 남겨진 성인의 문서를 받들어 이러한 글을 작성해 내었다. 모두다 마음을 긍긍하며 삼가 검약하고 스스로 억제하면서 정성과 전력을 다하였다. 결단코 작은 허물도 있지 않았다. 인구에 회자되는 한 사람의 공적이 혁혁히 빛나더니 떠나갔다. 정히 우리의 영(營)과 더불어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수백여 년 된 보루(堡壘)를 마주하는데 바다 물길 따라 경계함이 없었다. 이런 연고로 여러 공(諸公)의 거룩한 공적이 드러나, 공덕을 칭송해 보니 군데군데 여기저기 많았다. 하지만 생각건대, 이공은 덕택과 은혜로 일을 행하니 더욱 뛰어난 공적(功績)을 발췌(拔萃)하게 되었다.
정통한 군사적 계략은 물론 근본은 유가의 학술에 대한 것인데 변함없이 굳세고 바르며 겸손하게 백성을 구제하였다. 광대한 양의 각종 물품이 모여들어도 세세한 것을 삼가고 마음을 채웠으니 그 큰 뜻을 기린다. 그 청렴을 살펴보니 청빈한 생활에 힘써 절개를 지키고 자상하고 온화하며 재물을 베풀었다. 대개 취암(恥庵)은 뛰어난 현인인 영웅의 후예였으며 일찍이 노닐었던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문하생이었다. 그 학문이 모두 전해져, 인연이 이어진 천지 동체(天地同體)의 어진 사람이, 공(公)의 연원(淵源)이다.
 

칠질(70세)의 연령으로써 천리를 행역(行役)하는데 수레를 물리치고 말안장에 의지하는데도 피곤한줄 몰랐다. 맑은 첫새벽부터 관원(官員)이 모여 사무를 보다가 깊은 밤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군복을 벗지 않았으며 과감히 결단하고 지시하여 규정과 규칙을 제정하였다. 공(公)의 몸가짐이다.
상벌(賞罰)에는 반드시 믿음성 있게 해야 한다. 고로 착함과 나쁨이 섞이지 않게 되고 기쁨과 노여움이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고로 자비와 위엄을 아울려 행하여야 한다. 상 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권면하게 되니, 성내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행하지 아니해도 이르게 되며 서두르지 않아도 속도가 난다는 것이다. 공(公)의 말과 얼굴빛이다.

간단한 쇠사슬로 엮어 쌓아둔, 크고 작은 배를 나란히 정박하고 망루가 연이어져 있다. 모든 국가의 수요(需要)가 충족되고 좀벌레도 쉬어 나라가 태평한 것은 반드시 모두가 밤낮으로 계획한 덕분이다. 교섭(交涉) 통상(通商) 사무(事務)를 몸소 행하고 병장기를 수선하여 준비해 놓고 소금과 숯도 미리 감추어 놓았는데 그 용도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 노력이 심히 근면하였다. 여러 일들이 다 지난 후에도 상을 바라지 않았다. 공(公)의 마음 씀씀이와 그릇이다.

필히 연구하여 처음 일을 도모하면 지극하게 되며, 큰일을 도모함에 아주 작은 것도 빠뜨리지 말아야 한다. 책임 있고 무거운 일은 여러 번 헤아려 보면 온갖 쇠하여 없어진 일이 다시금 일어나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니 늘 쓰는 비용도 어긋나지 않는다. 공(公)의 재주와 지혜이다.
장수와 병졸은 학업을 힘써 권장하고 직분에 막힘이 없도록 하였고 군민(軍民)이 공히 조화롭게 정성들여 뽑으니 서로 겹침이 없었다. 돈의 융통이 어려우면 수미(需米)를 감가(減價)해 주었고 곡식이 귀하면 곳간을 풀어 안정을 시켰다. 송림 정책을 미리 준비해 약속을 지키니 연해 백성이 흔들리지 않았다. 공물을 나라에 바침에도 더하여 싣는 바가 없었으니 역참의 길이 편안하였다. 도랑물이 말라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도리어 집을 지어 진휼하였고 구제하기 어려운 천연두가 발생하면 약국을 설치해 치료하였다. 아름다운 효성은 포상하여 그윽이 숨겨진 바를 모두 밝히었다. 혼사에는 재물로 도와 홀아비와 과부의 어려움을 없앴다. 녹봉을 없애 폐단을 개선하고 체납한 세금을 탕감하여 병폐를 제거하였다. 본 영(營)의 업무뿐만 아니라, 몸가짐에 흐트러짐 없이 오로지 다스렸다. 일이 근처 연해에 이르렀고 관리가 쉬고 개똥벌레가 잠자는 곳이 되었다. 또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순행했다. 즉, 공(公)이 은혜로써 베푸는 정치였다.

고로 멈추는 날 없이 임하니 민의(民意)가 공자가 가까이 있는 듯 행하였다. 그리고 재상 이응서(李膺緖)의 죽음을 듣게 되었는데 모두가 놀라 부르짖는 소리에 눈물을 흘렀다. 친척 같이 서러워했다. 지금으로부터 세월이 흘러 이미 12년이나 지났는데 마치 어제처럼 뭇사람 입에 오르내린다. 즉, 우리의 공(公)이 지극히 어질고 후덕한 덕택(德澤)이다.
오랜 세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즉 일찍이 공을 보니 문득 그 군사의 직무를 처리하다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 남으면 숨은 근심에 오래도록 탄식했다. 이와 같이 그 뜻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다. 혹, 공무에 조금 한가한 때인 조용한 한낮 관청에서 검푸른 빛 나들이옷으로 단장하였는데 일찍이 곁에 있어 본 적이 없었으나 오직 거문고를 끌어안는 기쁨에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날뛰었다. 또한 이와 같이 행하니 세간의 사람들에게 발 없는 소문이, 그 즐거움 되어 퍼져나갔다. 아아! 공(公)의 한계(限界)였다.
아직 살펴보지 못한 것들이 있으나 이 어찌 학문에 공을 이루지 않았다 하리오. 그리고 하늘의 숫돌을 가지고 노닐던 사람이라 하였다. 옛날 극곡(郤縠)이 예악(禮樂)을 좋아하고 시서(詩書)를 숭상한다 하였는데 예나 지금이나 이름난 장수를 받든다. 양공(羊公 이응서)께서 갖옷에 느슨히 띠를 매고 강한루에서 노닐던 그 풍류가 전해온다. 이는 장수로써 모범이 되었고 우리 공(公)의 깊은 조예(造詣)가 이와 같았다. 그러나 위(衛)나라 시(詩)에서 전하지 아니하였는가? 교양 있는 군자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도다. 생각건대 우리 공(公)의 덕행과 선행이로다.
모든 학식을 감춘 장수로써 군자라고 일컫는 분이니 어찌 잊겠으며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아아! 위대하고 훌륭하도다. 이미 뭇사람들이 시문을 짓고 서로에게 읊는구나. 삼가 비석에 이렇게 적으면서, 이어 다음과 같이 송(頌)을 드리면서, 이로써 만세(萬世)의 군자(君子)를 고(告)하노라.

 
[粤在哲廟御極二年歲在辛亥 惟我使李公膺命莅玆營 訖三載而承召 有惠政至沒世而將官軍民 不能忘也 凡樹崇碑者五 磨厓者一 我左右廳昵侍帳下 甞所敬慕 無異乎七十子之服聖 而以舊刻之未慊衆心 咸欲改圖不朽 旣治珉 乃相與言曰 朝廷以我營爲三路要衝 而南邊之重寄也 必擇貴重臣威望素著 歷試內外 積有勞勩者而畀之 至今上朝二年乙丑 陞爲大都督府 命曰外登壇 其爲任鉅體尊如此 故前後承聖簡 出制是簡 咸兢兢以謹約自持 殫誠施措 不敢有小疵 欲樹一名蹟赫赫在人口而後去 政我營與和人 對壘數百年餘 而海沿無警者 以此故 諸公茂績之著有歌頌者 磊落相望 而惟我使李公德惠猷爲 尤卓然拔萃 精通武略而本之於儒術 剛正不渝而濟之以謙挹 慕其大則淵藪恢量而心實細謹 觀其廉則冰蘖勵操而慈和溥物 盖以恥庵大賢之英裔 甞遊於梅山洪先生之門 盡傳其學而有契於天地同體之仁者 公之淵源也 以七秩之齡 千里于役 而據鞍却輿 不以爲疲 淸晨開坐 夜分就寢 而不脫戎服 决拾在指 制爲常則 公之容儀也 賞罰必信 故臧否不混 喜怒不遷 故慈威幷行 以致不賞而勸 不怒而威 不行而至 不疾而速者 公之辭氣也 簡鍊儲置之方舟艦樓櫓之屬 凡係軍國所需而承平弛螙者 必皆晝宵籌度 躬親督辦 繕修器械 藏埋䀋炭 其費不貲 其勞甚勤 而事竢之後 不以請賞 公之器度也 謀始必究其至 圖大不遺纖毫 屢擧重役 百廢俱興 而不煩民力 不貸經用 公之才諝也 將士則課藝視勞而不滯窠 軍民則均調精抄而無疊簽 錢荒而需米減價 糓貴而廩糶從常 松政預立約束 而沿民不撓 貢獻毋得添載 而驛路晏然 溝瘠瀕死者 架屋以賙之 時疹無救者 設局以療之 褒尙孝懿 幽潛畢闡 資助婚嫁 怨曠頓除 捐俸補弊 蠲逋袪瘼 不但本營之務到底剸理也 至於左沿宿趼之處 亦行塡補 則公之惠政也 故當臨止之辰 群情擧若孔邇 而及聞騎箕之報 則無不驚號墮淚 如悲親戚 距今星霜 已歷一紀以外 而輿誦如昨日 則我公之至仁厚澤 永世不可泯者也 然甞覸公輒當軍務處置之餘 隱憂永歎 若有不能盡行其意者 而或値簿領稍閒 政堂晝閴 靘糚袨服 未嘗在側 而但抱琴以嬉 手舞足蹈 又若有擧世間之物 無足以易其樂者 於戲 公之涯涘 尙有未可窺者也 是豈非績學之成而游於天倪者歟 昔者 郤縠敦詩說禮 而古今推爲名帥 羊公輕裘緩帶 而江漢傳其風流 是固爲將之模範 而我公之深造有類於此者歟 然衛詩不云乎 有斐君子 終不可諼兮 惟我公之德之善 殆進於將韜而君子人者歟 胡可諼也 胡能諼也 猗歟盛哉 旣撰衆所相語者 敬書于石 而系之以頌 以告萬世之君子 頌曰]
송왈(頌曰),
允矣君子 진실로 훌륭한 군자여~
師中丈人 통제사 중에 어른이시며
將有五德 장수로써 오덕(五德)을 갖추고
公著其仁 그 어짊을 숨김없이 드러낸
承平之將 태평한 시절의 장수였다.
如斯亦足 또한 족히 이와 같아
竊覸公內 공이 관내를 살펴 엿보면,
龍矯虎伏 용이 트림을 하고 범이 엎드렸다.
囿物以大 국방의 큰일도 행하더니
操心于微 세밀한 것에도 마음을 썼다.
其曰不可 만일 공이 불가하다 말할 때면
視死如歸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聞義則服 의(義)에 대해서 들으면 실행하였고
積勞不衒 공로가 쌓여도 자랑하지 않았다.
必如公者 공평무사하게 반드시 이루니
可以一戰 가히 한번 싸워볼만 하였다.
豈惟猷略 어찌 보면 다스리는 계책인지라
被於一時 일시에 영향을 미쳤다.
與營終始 통제영(營)과 함께 시종일관
慕德不衰 쇠함 없는 덕(德)을 사모하노라.
有古百善 옛날부터 온갖 선행이 있어 왔으나
無今一疵 지금까지 하나의 허물도 발견되지 않으니
嗚虖至哉 아아! 지극하도다.
曷不永思 어찌 영원히 사모하지 않으랴.

[주1] 거사비(去思碑) : 선정(善政)을 추모하여 백성들이 세운 비. 불망비(不忘碑)는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새긴 비이지만, 스스로 세운 비석이 많다.
[주2] 빙얼(冰蘖) : 청고(淸苦)한 지절(志節)을 말한다. 청빈한 생활로 얼음을 마시고 나무의 움을 먹는다는 ‘음빙식얼(飮氷食蘖)’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주3] 극공(郤公) : 춘추 시대 진 문공(晉文公)의 장수 극곡(郤縠)을 지칭한 말로, 조쇠(趙衰)가 그를 추천하면서 “신은 그에 관한 말을 자주 들었는데, 예악(禮樂)을 좋아하고 시서(詩書)를 숭상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주4] 양공비(羊公碑) : 진(晉) 무제(武帝) 때 그는 양양(襄陽) 지역을 잘 다스려 명망과 명성이 자자했다. 주민들이 양공(羊公)이 죽은 후 현수산 위에 있는 墮淚碑(타루비)를 세워놓고 양양(襄陽)의 백성들은 세시(歲時)마다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그 비석을 보는 자는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는 이응서 장군을 비유한 말이다.
[주5] 경구완대(輕裘緩帶) : 군중(軍中)에서도 갑옷을 입지 않고 홀가분한 옷차림으로 있음을 이른 말로, 즉 전쟁을 하지 않음을 뜻한다. 진나라 양호(羊祜)가 군중에서 언제나 가벼운 가죽옷과 느슨한 띠 차림으로 갑옷도 입지 않고 경내 군사도 십여 인에 불과했다한다.
[주6] 오덕(五德) : 여러 5덕이 있으나, 여기서는 무사가 지켜야할 다섯 가지 덕(德). 지(智), 신(信), 인(仁), 용(勇), 엄(嚴)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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