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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것은 늪과 같다, 손남숙 시집 <<우포늪>>
가장 아름다운 것은 늪과 같다, 손남숙 시집 <<우포늪>>
  • 원종태 기자
  • 승인 2016.01.12 1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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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善若水 노자 도덕경 제 8장,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물과 같다. 여기에 물 대신에 늪을 넣어본다. 상선약늪 가장 아름다운 것은 늪과 같다(저작권을 위해서도 시를 완성해야한다는 강박의 늪에 빠지기도 했다.^^).

물 뻘 물풀들 나무들 물고기들 시끄러운 새들 검푸른 물숲 온갖 색들 색즉시공 공즉시색 꼬리 긴 것들 꼬리 짧은 것들 아픈 것들 물렁물렁한 것들 뻘의 심연이 토해낸 자색 가시연꽃 제 살을 찢어 발기며 피어나는 자색 창연. 노랑어리연 그 외 인간이라면 시대착오주의자 현실부적응자도 조용히 품어줄 것 같은 늪. 가장 낮은 곳 패배한 것들이 다시 패배하는 곳.

'백년도 못사는 사람에게도 혼이 있다는데 나무에도 혼이 없겠는가'는 전우익 선생님 말씀을 빌려 '수 억 년 저 늪에 어찌 영혼이 없겠는가'라는 생각도 보태보면서...
어느 여름날 밤 깜깜 우포늪을 걸어갈 적에 '상선약늪'을 제목삼아 우포늪에 대한 시를 쓰려고 했다.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 우포에서 반 백 년을 보낸 손남숙 누님(누님은 얼마나 늪같은 적절한 이름인가)이 처녀시집 <<우포늪>>(푸른사상 시선 57)을 펴냈다.
후다닥 읽고 뻘처럼 늪처럼 빠져들고 나서 '상선<<우포늪>>'이라고 호명해줌으로써 나는 물러나기로 했다.

늪에 대한 시 한편 낳으려면 50년은 아니더라도 5년정도는 늪에 살아봐야하지 않겠는가. 비오는 날 바람 부는 날 눈 오는 날 가을 겨울 봄 두꺼비 나오는 날 눈 내리는 날 사계절 곱하기 밤 새벽 아침 한 낮 오후 이렇게 만이라도 겪어봐야 우포늪을 쓸 수 있지 않겠냐고 늪의 시들이 말한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자 늪은 불을 끄고 별을 켰다. 켜진 별들의 숫자만큼 밤이 깊어지자 마른 은하수에 별들이 점점 돋아났다. 여름을 만난 물풀들이 맹렬하게 물을 지워가는 소리가 스르륵스르륵 들려왔다. 늪에 켜진 별들을 따라 검은 길가 반딧불이 몇 점 불을 켰다.
우포늪 1억 4천만년 시간 속에 우리, 반딧불이 한 점 같지 않느냐고 누군가 대답을 바라지 않는 물음을 물었고, 걷는 길 내내 어둑했다.

물은 색을 풀고/물은 색을 흔들어서 다른 색을 만든다/물의 공장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본 사람은 사실/색의 진짜 친애하는 이웃은 소리라는 것을 알 것이다/그렇다면 소리가 색을 만드는 것일까?/소리는 색의 받침과도 같아서/식물의 씨앗을 층층이 쌓아놓고/저 강바닥 기슭에서부터 소리를 쏘아올린다 그러면/늪의 표면에 연둣빛 꼼지락거림이 올라온다/식물은 소리들이 잘 이어지게 물에 바짝 붙어 다닌다/아직은 물의 벨트가 헐렁헐렁하다/물은 색과 소리를 알맞게 배접한 다음/늪의 이 끝과 저 끝에 앉힌다/생이가래와 개구리밥이 마름을 에워싸고/매자기와 줄이 바깥을 둘러서면 이윽고/물은 색을 열렬히 비비는 일을 시작한다/황홀한 저녁의 꽃이 올라오고/새들이 사막의 모래바람같이 타오르는 불을 휘감을 때/물은 빠르게 제 모습을 풀어서 거대한 녹색 카펫을 짠다/8월의 늪에는 식물의 씨줄 날줄이/뜨겁게 뭍과 물을 오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가시연꽃이 힘을 주어 도장 찍는 소리/완성이다!/사람들이 열심히 사간다/<늪은 카펫 공장>

강이 쩡쩡 소리를 내며 강물을 얼리듯이, 늪은 느읖 느읖 소리를 내며 초록의 카펫을 짠다. 쩌읖쩌읖 소리를 낼 수도 있다. 연둣빛 3월부터 가시연꽃 피는 8월까지 거대한 녹색 카펫을 짜는 늪.
기껏해야 자동차로 부웅 왔다가 잠시잠깐 시간의 단면만 도려 가는, 가위질 여행자들인 늪 밖 사람들에게 봄과 여름, 늪의 시간을 압축해 보여준다. 늪 안 사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8월 가시연꽃이 힘을 주어 도장을 찍는 소리를 내며 피어나다니! 화룡점정의 가시연꽃으로 하여 한 여름의 늪이 완성된다. 가시로 완성된 여름은 물풀이 늪에 넙죽 인사하는 것으로 계절을 바꾸고 철새들이 오는 겨울을 기다린다

물풀은 늪에 넙죽 인사한다/잘 봐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한 해 잘 견뎠다고 고맙다고/인사를 잘하는 식물을 늪이 기특하다고 궁둥이를 툭툭 쳐준다/
그러면 내년 자릿세 내지 않아도 된다/그러려고 새들이 좋아하는 씨와 열매를 잔뜩 만들어놓았다/늪은 물풀의 속셈을 모른 척 받아서 진흙 밑에 잘 감추어둔다/봄에 꺼내보마<인사 전문>

그는 색이 내는 소리를 들을 줄 안다. 소리가 색을 낳고 소리와 색이 다르지 않음을 안다. 꽃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새들이 구름을 접어서 깃에 넣기도 한다. 큰고니의 날개 짓은 음악을 횡단하는 연주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새를 점점 닮아가고 새가 나(시인)를 좋아하는 경지까지 이르렀지만 머지않아 곧 새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늪에 나무들에 왕버들에 새가 깃들 듯이. 그의 몸에 여기저기에 머리삔처럼, 브로치처럼 실밥처럼 새들이 깃들 것이다. 새들이 그의 몸에 꽃필 것이다. 그는 늪과 자연과 합일하기 위해 시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를 통해 자연과 합일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점점 새를 닮아간다/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새처럼 보이기 위해서/사람 냄새 빼놓고 다닌다/새가 놀라지 않도록/내 옷은 낡고/내 얼굴은 흙처럼/새들은 해마다 다채로운 색으로 갈아입지만/나는 날마다 색을 빼고 물이 빠지게 한다/새들이 몰라보도록/나는 시든 풀이나 썩은 나무둥치와 같은 색/새가 나를 좋아한다 <새가 좋아한다 전문>

손 시인은 어느 산문에서 "숨막히는 인공도시에서 자연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자연을 지키려는 사람을 비난하는 그 이중적인 작태"를 비판하고 "지금 이곳, 이 자리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소비를 줄이고 쓰레기를 줄이고 남루함을 견디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내가 수년간 겪은 바로는 그는 이러한 생각, 자발적 가난과 남루함을 생활 속에 끌어당기고 있는 시인이다. 매연 때문에 미안해하면서 어쩔 수 없이 20년 된 차를 끌고 다닌다.
시집 <<우포늪>>은 스스로 늪이 된 여자가 쓴 우포늪에 대한 시적 생태보고서다. 한 문장, 한구절에 새와 물풀과 나무들의 생태를 정확히 포착해 낸다. 또 늪의 문장(?)처럼 호흡은 길고 느리고 깊은데, 가끔 물새들이 물을 뽀족하게 파먹듯 날렵하고 찌르는 것이 있다.
1억 4천만년의 시간을 '비잠주복(飛潛走伏)'과 함께 비잠주복이 되어서 열람하고 있는 시인 손남숙 누님. '고독이 뭔지 좀 아'는(외가리 고독 중) 시인이 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들을 계속 밀어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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