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역병(疫病)의 현황을 보고합니다
역병(疫病)의 현황을 보고합니다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5.06.15 08: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사람을 치료하는 이치나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가 똑같다.


역병(疫病)의 현황을 보고합니다

[번역문]

비변사 낭청 조계가 병민(病民)의 현황을 살피고 와서 보고한 내용이다.
“동부는 구(舊) 병민 146명과 신(新) 병민 5명, 남부는 구 병민 502명과 신 병민 21명, 서부는 구 병민 112명과 신 병민 6명, 북부는 구 병민 314명과 신 병민 7명입니다. 신구 병민 총 1,113명 가운데 나아서 도성으로 돌아간 사람이 94명, 사망한 사람이 7명, 현재 앓고 있는 사람이 154명, 나아지고 있는 사람이 858명이며, 현재 남아 있는 병막(病幕)이 421곳이니, 지난번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구 병민 중에서 굶주림과 곤궁함이 더욱 심한 자 13명을 뽑고 신 병민 중에서도 22명을 뽑아 총 35명을 건장한 자와 약한 자로 구별하여 규례대로 쌀을 지급해 주었는데, 총 11말입니다.”

[원문]

備郞趙𡹘以病民摘奸啓:
“東部, 舊病民一百四十六名, 新病民五名; 南部, 舊病民五百二名, 新病民二十一名; 西部, 舊病民一百十二名, 新病民六名; 北部, 舊病民三百十四名, 新病民七名。合新舊病民一千一百十三名內, 還入九十四名, 不救七名, 方痛一百五十四名, 向差八百五十八名, 時存幕四百二十一處, 比之向者, 顯有向衰之漸。舊病民中抄其尤甚饑困者十三名, 新病民中又抄當給者二十二名, 合三十五名, 區別壯弱, 依例給米, 則合米爲十一斗。”

- 『일성록(日省錄)』 정조 12년(1788) 7월 19일


 

 

 


 


위 기록은 정조 12년 5월 중순부터 도성에 역병이 돌기 시작한 뒤 두 달쯤 지난 7월 19일에 비변사의 담당 낭청이 병민의 치료와 관리 현황을 보고한 내용으로, 전후의 과정을 포함하여『일성록』에 소상하게 실려 있다.

5월 22일에, 역병이 퍼지고 있다는 보고에 따라 정조는 한성부에서 환자의 규모를 파악하여 계속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 진휼청과 각 군영은 궁핍한 병민들에게 물자를 대주어 교외(郊外)에 병막을 설치하고 격리 치료를 받도록 해 주며 사망한 자에게는 매장 비용 등을 대주도록 하였다. 이어 국정의 총괄 기관인 비변사에서 이 과정을 관리ㆍ감독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한성부에서 5월 30일에 보고한 내용이다.
“이번 5월 26일부터 30일까지 중부는 감염 의심자 125명을 교외의 병막으로 내보냈고, 동부는 193명 중 나아서 도성으로 돌아간 사람 7명, 사망 2명, 병막 96곳입니다. 서부는 253명 중 도성으로 돌아간 사람 34명, 사망 4명, 병막 118곳입니다. 남부는 807명 중 도성으로 돌아간 사람 18명, 사망 13명, 병막 339곳입니다. 북부는 362명 중 도성으로 돌아간 사람 11명, 사망 4명, 병막 153곳입니다. ……”

또 진휼청에서 6월 2일에 보고한 내용이다.
“병막이 총 727곳이고 병민이 총 1,600명인데, 5월 22일부터 30일까지 이전 병막을 보수하고 새 병막을 만들어 주는 데 빈 가마니[空石] 4,191닢, 장나무[長木] 2,103개, 망얽이[網兀] 309닢이 들었습니다. 사망한 45명에게는 전례대로 각각 포(布) 1필, 돈 1냥을 지급하였고, 해당 부에서 잘 매장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다른 왕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구체적인 보고와 유기적인 노력이 계속 이어지던 끝에 위에서 본 7월 19일의 보고에서 총 1,113명의 환자 중에 새 환자는 39명 정도로 현저히 줄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9월 1일에는 더욱 반가운 비변사의 보고가 올라왔다.
“병민의 현황을 살피고 온 낭청의 보고를 보니, 병민은 29명이고 병막은 23곳이라고 합니다. 가을 하늘이 높아지고 날씨가 서늘해져서 역병의 기운이 가라앉은 가운데 병민이란 자들도 모두 병이 거의 나은 부류입니다. 비변사 낭청의 활동을 오늘부터 정지하겠습니다.”

서늘해지는 날씨 덕분에 역병의 기운이 가라앉고 있다는 보고였는데, 그 이면에는 역병의 확산을 막아내기 위해 위아래가 함께 한 노력이 숨어 있었다. 이때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병막을 직접 살피고 다닌 오부의 관원들은 이듬해 특별 승진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들어 특히 도성을 중심으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역병이 발생할 경우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도성 안으로 유입되는 역병의 차단과 발생한 역병의 조속한 수습은 국가 운영의 기반을 지켜내는 중대한 일로 인식되었다.

정조 10년 4월에 도성에 홍역이 돌기 시작할 때는 구료 절목(救療節目)을 정하고 전의감과 혜민서를 중심으로 의약을 통한 치료에 나섰으니, 당시의 환자와 약처방의 현황 보고도 『일성록』에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그러나 12년에 발생한 역병은 원인과 처방을 찾아내기 어려웠고 혜민서나 활인서의 기능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것은 적극적인 격리 치료뿐이었다. 기왕에도 격리 치료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나 정조 때처럼 국가의 행정 기능을 최대한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수습해 나간 경우는 찾기 어렵다.

정조는 세손 시절에 영조를 간호하면서부터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수민묘전(壽民妙詮)』이라는 의학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 서문에서 ‘사람을 치료하는 이치나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가 똑같다.’라고 하고, 나라도 폐단의 근원과 실정이 각기 다르니 이를 밝혀 처방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하였다. 이런 생각이 국정 운영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오늘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도 백성의 생명을 지켜줘야 하는 국가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실정에 맞게 지휘해 나간 정조와 최선을 다한 신하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거울로 삼을 만한 것 같다.
 



 

 

글쓴이 : 김경희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주요 역서 - 『현종실록』, 『정조실록』
- 고종대 『승정원일기』
- 정조대 『일성록』
- 『국조보감』, 『임하필기』, 『홍재전서』, 『명의록』 외 다수의 번역에 참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