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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유치환 '친일문제' 정면 제기
청마 유치환 '친일문제' 정면 제기
  • 원종태 기자
  • 승인 2015.03.27 1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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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일교수 단행본, 친일작품 5편 및 친일 행적 파헤쳐

경남대 국문과 박태일교수의 논문과 책, 박교수는 친일 대신 일제에 부역했다는 의미를 강조해 '부왜'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한국 문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친일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학술서적이 나와 관심이다.

경남대 박태일교수가 최근 펴낸 <<유치환과 이원수의 부왜문학>>(소명출판 2015.2)이다.


책에 따르면 청마의 친일작품은 모두 5편이며, 1940년 통영을 떠나 만주로 간 것은 '지사형도피'가 아니고, 청마의 글은 '강요된 협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부왜(친일)'라고 주장하고 있다.


박교수는 그 근거로 ' 청마가 일제관동군 기관지격인 <만선일보>1942.2.6자에 발표한 산문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 시 '수','전야','북두성', '들녘' 등 5편을 들고있다.
산문 '..문필가의 각오'는 일제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예술가들에게 황국신민으로서 역할을 강조하는 글로서, 해석이 필요한 시보다 친일작품성이 뚜렷하다.
'수'에 나오는 효수당한 '비적'의 성격을 두고 그동안 친일논란을 빚어왔는데 이 책은 효수당한 머리의 주인이 동북항일연군(한중연합부대) 총사령관 조상지 장군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또 만주(하얼빈)협회회는 일제의 전시수탈체제수호의 중심기구로서 치안공작 등을 벌이던 조직이므로, 청마의 협화회 근무는 '제국주의의 억압과 수탈 앞자리에 서'있었다고 분석한다.
한편 거제시는 청마기념관, 통영에는 청마문학관이 있으며 청마문학상 등을 통해 각종 기념, 현양을 벌이고 있다.

유치환의 친일산문이 실린 만선일보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
 

오늘 大東亞戰의 의의와 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와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것일 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皇國臣民된 우리는 조고마한 개인적 생활의 불편과 가튼 것은 수에 모를수 없는만큼 여간 커다란 보람이 안입니다. 시국에 편승하여서도 안될 것이고, 시대에 탈리하어도 안될 것이고, 어데까지던지 진실한 인간생활의 탐구를 국가의 의지함에 전개시켜가지 안으면 안될 것입니다.
나라가 있어야 산하(山河)도 있는 것을 매거할 수 업시 목도하고 있지 안습니까.

오늘 赫赫한 일본의 指導的地盤 우에다 바빌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선일보 1942.2.6) 위의 책에서 인용

 

 

십이월의 북만 北滿 눈도 안 오고
오직 만물을 가각 苛刻하는 흑룡강 말라빠진 바람에 헐벗은
이 적은 가성 街城 네거리에
비적 匪賊의 머리 두 개 높이 내걸려 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소년같이 작고
반쯤 뜬 눈은
먼 한천 寒天에 모호히 잠들은 삭북 朔北의 산하를 바라고 있도다
너희 죽어 율 律의 처단의 어떠함을 알았느뇨
이는 사악 四惡이 아니라
질서를 보전하려면 인명도 계구 鷄狗와 같을 수 있도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 除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 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험렬 險烈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 無賴한 넋이여 명목 暝目하라!
아아 이 불모한 사변 思辨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국민문학 3월호 1942,38~39쪽) 위의 책에서 인용

 

 연변대 김관웅 교수의 /수'에 나타난 '비적'에 대한 연구

1940년을 전후로 하여 동북항일련군은 가장 엄혹한 시련을 겪어 되였다. 당시 항일련군의 장병들이 전투에서 일위(日伪) 군경들이나 첩자들에 의해 사살되는 경우, 특히는 고위급 항일련군 지휘관들은 일위군경에 의해 목이 잘려 효시되였다는 게 정설로 알려지고 있다. 아래에서 그 사례를 몇 개만 들어보기로 하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지휘 양정우(楊靖宇, 1905-1940)는 1940년 2월 몽강현 삼도위자에서 일본토벌군에 포위되어 투항을 거부하다가 사살됐다. 그의 시신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가 잘려 몽강현 현성에 사흘 동안 내걸려져 효시되였다가 신경(장춘)으로 올려보냈다.

위증민(1909-1941)은 중공 남만성위 서기,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정치부주임 겸 2군 정치위원을 맡았던 유명한 항일장령이였다. 1940년 가을에 중병에 걸린 위증민은 길림성 화전현 목단령 서쪽 기슭에서 병치료를 하다가 1941년 3월 8일 병사한다. 그러나 일제 군경들은 위증민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머리를 잘라서는 화전현 현성의 네거리에 내걸어 효수하였다.(朱宏启主编 《东北抗日联军》上卷,“魏拯民“, 世界华人出版社, 2003年, 제26페지를 참조하라)

그리고 또 바로 류치환이 살았던 할빈 동남부, 동북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조선인 반일투사 허형식(許亨植, 1909-1942)은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3군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42년 8월 3일 지금의 흑룡강성 경성현(慶城縣) 청풍령(靑風嶺)에서 만주국군 토벌대에 포위되어 사살되여 일본군에 의해 양정우나 위증민처럼 효수되였었다.

그리고 당시 북만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졌던 주하(珠河와 류치환이 살았던 연수현은 린접되여 있음)유격대의 창시자이며 한때는 동북항일련군 총사령을 맡았던 조상지(1908-1942)는 1942년 2월 12일에 지금의 흑룡강성 탕원현 오동하분주소를 습격하려다가 첩자가 쏜 총에 중상을 입고 쓰러져 체포되여 8시간 후에 죽자 머리를 일위 군경들은 조상지의 머리를 잘라냈다. 가목사에 있는 삼강성(三江省) 경무청에서는 확실히 조상지가 옳은지를 판명하고자 후지하라(藤原)사무관 등 두 사람을 시켜 원 북만 항일련군의 지휘관으로 있었던, 그래서 조상지를 잘 아는 리화당(李华堂, 변절자임)을 데리고 조상지가 사살당한 당지로 달려가서 조상지의 수급(首级)을 검험한 뒤에야 가목사에 있는 삼강성 경무청으로 실어갔다. 그래서 필자는 류치환의 시 “수”에 나오는 “이 적은 街城 네거리에 匪賊의 머리 두 개 내곁테있나니”라는 이 시구에서 이른바 “街城”은 佳木斯의 략칭은 아닌가? 그리고 그 “머리 두 개 내결테있나니”라고 이 구절은 류치환이 혹시 가목사의 그 현장에 가 있지나 않았는지 하는 의심까지 든다. 당시 류치환은 협화회에서 일을 보고 있었으니 이런 사건에 어떤 원인에 동원되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류치환의 시 “수(首)”와 조상지의 수급(首级) 사이에 련관이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점은 또 몇 곳이 더 있다.

조상지 장군의 머리가 잘려서 효수된 이 사건은 바로 류치환이 그 문제의 시“수(首)”를 써서 발표한 시간(1942년 3월에 발표)과 완전히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도 당시 류치환이 살고있었던 연수현과 탕원현은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 조상지는 한 때는 동북항일련군의 총사령관까지 맡았던 사람인지라 그의 죽음은 아마도 당시 전반 만주국 사회에뿐만 아니라 류치환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리라 사료된다.

이 적은 街城 네거리에 /匪賊의 머리 두 개 내결테있나니/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少年같이 적고 /반쯤 뜬 눈은/ 먼 寒天의 模糊히 저물은 朔北의 山河를 바라보고 있도다

이 부분에서 주목되는것은 “匪賊의 머리 두 개 내결테있나니”라는 시구이다. 당시 조상지와 함께 왕영효(王永孝)라는 그의 부하도 사살되여 머리가 잘려졌고 조상지의 수급(首级)과 함께 왕영효의 수급도 삼강성 경무청으로 이송(移送)되였다고 한다. (参照:“三江省警务厅关于射杀前东北抗日联军总指挥赵尚志的情况报告”1942年2月19日, 引自朱宏启主编《东北抗日联军》下卷, 2003年,世界华人出版社,第1210页)그러니 류치환의 시“수”에 나오는 “匪賊의 머리 두 개 내결테있나니”라는 시구와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또 주목되는것은 “비적”의 머리가 아주“적다”고 묘사한 점이다.

즉 “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少年 같이 적고”라는 시행을 보아서 마치도 효수된 조상지의 머리를 직접 보고 쓴것만 같다. 조상지는 비록 일위(日伪)군경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항일명장이였지만 그 체구는 아주 왜소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고 한다.

1942년 2월 12일, 일위군경들이 조상지의 시신를 재여 보니 키가 162cm밖에 안 되였다.(동상서, 第1210页) 그리고 조상지는 석달 전에 쏘련으로부터 만주에 다시 잠입하여 산속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숨어서 지내왔으니(동상서, 제1213页) 얼굴이 몹시 마르고 초췌했을 것만은 분명하다. 류치환이 ”수(首)”에서“그 검푸른 얼굴은 말라 少年같이 적고”라고 묘사한것을 보아서 류치환이 직접 조상지의 수급(首级)을 현장에서 보고 이 시를 쓰지나 않았나 하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김관웅 <류치환의 '수' 속의 비적의 머리는 누구의것인가?> 2013.5.12
위 책 88~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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