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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명작의 무대
거제도, 명작의 무대
  • 원종태 기자
  • 승인 2015.01.02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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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작가회의 <바람의섬 평화를 노래하다> 중

 
*이 글은 경남작가회의의 찾아가는 문화활동, 거제 스토리텔링 작품집, <바람의 섬 평화를 노래하다>에 실린 글이다.

 

우리동네, 우리지역, 우리와 가까운 곳의 소식은 당연히 뉴스 가치가 높다. 문학작품에서도 독자 ‘근접성’이 관심을 더 끄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사는 시공간이 여러 작품의 무대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이 곳은 새로운 공간이 되고,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거제도를 배경으로 쓰여진 문학작품은 무엇이 있을까? 소박한 물음에서 이 글은 시작됐다. <거제도, 명작의 무대>라는 그럴듯한 제목을 달았지만, 이 글은 거제도가 배경이나 소재로 등장하는 문학작품이나 거제도와 연관된 작가들을 잠시 불러낼 뿐이며, 이들만 선정된 것은 필자의 우둔함에다 작가의 ‘저명성’에 기댄 측면이 크다.

거제도는 섬이다. 지정학적 조건으로 지난 천 년간 최적의 유배지였다. 개경과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절해고도이면서도 관청과 수군영 등 행정력이 잘 정비돼 있어서 유배자 관리가 비교적 용이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시기에는 포로수용소로 유명세를 탔다. 현재는 세계조선산업 빅3인 대우와 삼성조선이 있어 글로벌 경제의 한 가운데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배자나 포로나 노동자들은 물론 토착민들도 ‘존재는 여기 있으면서도 의식은 중앙이나 떠나온 곳, 바깥을 향하는’ 이중적 존재다. 이 실존이 가지는 긴장감은 ‘유형의식’이돼 이곳 사람들 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거제도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많은 문학작품에서 유배의식과 포로수용소체험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고려가요인 정과정곡은 여러면에서 타이틀을 갖고 있다. 유배문학의 효시, 우리말로 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작자가 유일한 노래, 신하가 임금을 그리워하는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정서는 둔덕면 우두봉 정상에 있는 둔덕기성(폐왕성)에 유배왔으며, 이곳에서 정과정곡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거제도, 소설 무대에 등장하다

일제하 벽초 홍명희의 대하역사소설 <임꺽정>은 홍문관 교리 이장곤이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연루돼 거제도로 유배됐다가 웅천(지금의 진해)으로 탈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임꺽정>은 그 친척들의 내력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데 이 교리의 유배와 탈출은 임꺽정의 출생배경을 다루는 ‘봉단편’의 도입부인 셈이다.
홍명희는 충북괴산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24년 동아일보편집국장, 25년 시대일보 사장을 거쳐 27년에는 항일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29년 민중대회사건으로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러던 중 옥중에서 임꺽정을 집필하기도 했다.
벽초는 일제식민지시대 민족해방운동의 방편으로 민중의 결집을 원했고 명종 때 황해도의 실제 도적이었던 임꺽정을 불러내 의적이자 영웅으로 묘사한 <임꺽정>을 썼다. 조선팔도 전체를 무대로 조선 중기 민초들의 생활상과 청석골 두령들의 무용담은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전복적 카타르시스를 준다.

한국현대문학사와 거제도가 만나는 최고 최대의 접점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시공간이다.
거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현대 소설문학작품의 거의 대부분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뗄래야 뗄 수 없다.
문학은 시대상황의 반영이고, 모국어로 쓰여진 문학이 이 비극을 비켜나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시기 거제도는 이데올로기 갈등에 따른 폭력과 죽음의 공간이자 또 하나의 전쟁터이며, 포로와 피난민은 물론 토착민에게도 유형의 땅으로 그려지고 있다.
6.25와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소설작품으로는 최인훈의 <광장> 조정래의 <태백산맥> 손영목의 <풍화>와 최근작 <거제도> 장용학의 <요한시집> 강용준의 <철조망> 이범선의 <갈매기> 등을 들 수 있다.

장용학의 단편 <요한시집>(현대문학, 1955)은 전후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소설로 그를 50년대의 문제작가로 떠오르게 한 작품이다.
전통적 소설기법을 무시하고 토끼의 우화를 차용하고 관념적인 설명과 내적 독백형식의 서술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인간의 실존과 자유의 문제를 다룬다.
남해의 고도에 붉은 기와 푸른 기가 다시 바닷바람에 막서서 휘날리며 친공측과 반공측 포로들이 또 하나의 전쟁을 벌이는 수용소의 모습이 잔인하게 묘사되고 있다.

'변소에 들어가서 뒤를 보려다가 무엇이 손질하고 있는 것 같아서 밑을 내려다보고 그만 소리도 못 지르고 거품을 물었다. 그것은 사람의 손이었다. 누런 배설물 속에 비스듬히 꽂혀있는 사람의 손, 쭉 뻗은 손가락은 내 발목을 잡아 쥐지 못해하는 그것은, 그 전날 죽은 누혜의 손목이었던 것이다.'

강용준의 <철조망>(1960)도 포로수용소내 좌우익간 충돌사건을 다룬 것이다. 주인공 민수는 비밀지하실에서 친공포로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하다 쿠테타 자백을 하면 살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자유에의 탈출을 시도하다 총에 맞아 죽는다는 줄거리로, 극한 상황속에서도 운명과 대결하는 인간상을 보여준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1950년 11월부터 거제시 고현·상동·용산·양정·수월·해명 등 360만평에 설치돼 인민군 15만, 중공군 포로 2만, 여자포로와 의용군 3천명 등 최대 17만 3000명을 수용했다.
당시 지역민은 약 10만명, 피난민 약 10만명 등 40만명이 거제도에 각자의 모습으로 살았다.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간의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으며,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소장인 돗드 준장이 3일간 납치되는 세계전쟁사상 초유의 사건도 발생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후 폐쇄된 이후 잔존 건물이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거제시청 근처에는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이 조성돼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다.

최인훈의 장편 <광장>(새벽, 1960.10)은 전후소설의 대표작이다.
최인훈은 서문에서 '아시아적 전제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리는 것을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4월혁명이 없었다면 남북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중립국행을 선택하는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문제작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광장은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는 생생한 표현으로 시작한다.

<광장>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대학 철학과 학생인 이명준은 자기만의 밀실에서 편협하게 사는 인물이며, 그 아버지가 북한에서 대남방송 책임자여서 경찰서에 불려가 구타를 당하고 빨갱이로 몰린 것을 계기로 남한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한다.
이명준에게 북은 공식 명령과 복종만이 보일 뿐, 진정한 삶의 광장은 없는 것을 비판하는 등 남북 어느 곳에서도 밀실과 광장이 어울린 세계를 찾지못한 채 전쟁에 뛰어들어 포로가 된 후 포로 송환 과정에서 중립국을 선택, 인도의 타고르호가 남지나해를 항해하는 어느 밤, 투신 자살한다는 줄거리다.
수용소에서 이명준은 "남녘의 가시 울타리/카키빛 슬리핑 백 속에/ 나는 시들어빠진 한 송이 바나나"라는 자조적인 시를 짓기도 한다. 전쟁이 끝나자 이명준은 남이냐 북이냐 선택의 기로에 선다. '밀실' 만 있고 '광장'이 없는 남한과, '광장'만 있고 '밀실'은 없는 북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할 막다를 길에서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 같은 중립국행'을 택한다.


"동무는 어느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릭국도,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중략)
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허허허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나라 내 민족의 한사람이......"
"중립국."

하나의 선택만이 강요당하는 흑백 세계에서의 전면적인 이탈을 선언하는 이 대목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이 아니었으면 불가능 했다. <광장>은 한국전쟁과 분단에 대한 수난의식적인 접근과 맹목적 반공의식적 접근으로 창작한 50년대 소설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6.25 컴플렉스를 주체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또 분단문제와 관련하여 남북한 정치 이데올로기를 균형있게 다룬 첫 번째 작품이라는 평가다.

분단문학 최대의 성과로 평가받는 조정래의 <태백산맥>(1986)은 80년대 억압적인 현실속에서 이념의 금기지대를 넘어서면서 분단과 이데올로기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분단내인론으로 접근한 보기 드문 경우다.
작품의 무대는 전라도 벌교를 시발지로 해서 태백산맥을 따라 전국토로 확대되다, 종착역에서 거제도포로수용소로 이동된다. 주인공 격인 김범우와 정하섭은 포로로 이곳에서 만나는데 당시 수용소내 상황이 잘 묘사되고 있다.

이범선의 단편 <갈매기>(현대문학 1958.12)는 50년대 거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은, 인정 가득한 수채화 같은 공간을 제시하면서, 훼손되지 않은 삶의 원형을 보여준다 하겠다.
작가가 51년부터 3년간 거제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으로 당시 장승포 지역에 대해 묘사가 잘 돼 있다.

'호수처럼 동글한 바다 한가운데는 경찰서 수상 경비선이 하얀 선체를 한가히 띄우고 있고, 왼쪽시장 앞에는 돛대 끝에 빨간 헝겁을 단 어선이 네척 어깨를 비비고 머물렀다. 그리고 저만큼 앞에 두 대의 흰 등대, 그 등대 허리에 가는 수평선이 죽 가로 그어졌다.‘

50년대 장승포항구와 현재의 장승포 항구는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왼쪽시장인 ‘신부시장’이 건물로 바뀌었고, 어선은 커지고 숫자가 늘었으며, 외도와 해금강을 오가는 유람선이 정박해 있고 해안이 매립되고 큰 건물이 들어섰을 뿐이다.

거제도의 해방공간과 전쟁전후 시대상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는 단연 송영목의 장편 <풍화>(1983)와 <거제도>(2006)를 들 수 있다.
풍화는 장승포와 지금은 조선공단으로 인해 사라진 늦해(느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풍화는 해방과 함께 찾아온 좌우익간 갈등과 패망한 일본 어장 소유권 확보에 따른 갈등을 주요한 줄거리로 하고 있다.
장편 <거제도>는 무대를 포로수용소가 들어선 고현과 상동으로 옮겼으며, 작가는 '문학적으로 뿐만아니라 한국전쟁 기록면에서도 거제도포로수용소 사건의 전말을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집대성 했다'고 밝히고 있다.
거제도 출신인 작가의 경험이 강하게 투영돼 있는 두 작품은 풍부한 거제도 사투리와 함께 거제도 구석구석 지명을 담고 있어, 반세기 전 거제도를 공부하는데 제격이다.

방현석의 중편 <지옥선사람들>(1991)은 80년대 후반 노동운동과 함께 성장한 노동문학 작품 가운데 거제도를 배경으로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해포조선소의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이 만드는 배를 지옥선이라 불렀다'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작품속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서술내용을 볼 때 삼성조선소를 모델로 하여 대우조선과 거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해포라는 지명과 해포대교를 막아버리면 완전히 고립된다든가, 해포와 돌산을 가로질러 쌓은 방파제 등의 표현이 말해준다. 이 소설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노조설립을 위해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현실에 대한 탐구와 노동자의 삶을 잘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윤후명 작가의 소설 '지심도 사랑을 품다'

소설가 윤후명의 대표작 '팔색조-새의 초상'은 1983년 여름 3개월간 거제에 체류하면서 쓴 소설이다. 나중에 드라마로 옮겨져 MBC '베스트셀러 극장'을 통해 방송됐다.
팔색조를 찾아 떠나는 남자에 관한 소설이이며, 이 작품의 주 무대는 장승포와 동백섬 지심도이다. 다음은 작품의 일부.

‘내가 팔색조를 찾아 그 작은 섬으로 떠난 것은 그런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팔색조를 꼭 찾겠다는 결심은 아니었다고 해야 옳다. 그 작은 섬에 팔색조가 날아와 깃든다는 데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왈가왈부하고 있는 문제라고 했었다. 팔색조를 볼 수 있다거나 아니면 울음소리라도 들을 수있다거나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좁은 해안통길을 걸어가면 어협 공판장 옆으로 도선 선착장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그 작은 섬이 먼 바다 위에 흐릿하게 떠 있는 것을 볼수도 있기도 했다.’

윤후명은 거제도와 지심도를 모티브로 한 이 소설과 시, 동화, 에세이, 그림을 묶어서 만든 <지심도 사랑을 품다>를 2009년 펴냈다.

시인 김수영 유치환 김기호

4.19와 자유의 시인, 한국 문학의 거대한 뿌리, 김수영(1921~1968) 시인도 거제도포로수용소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수용소 생활은 그의 문학이 이데올로기측면과 정치적 자유를 탐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전쟁이 터졌을 때, 시인의 나이는 서른. 그는 거제 포로 수용소의 포로 103655번이었다. ‘세계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는 나의 욕망과 철학이 나에게 있었다면 그것을 만족시켜 준 것이 이 포로생활이었다고 생각한다.’ ‘살아있음에 대한 비참한 안도감’과 함께 ‘나의 시는 이때로부터 변하였다. 나의 뒤만 따라오는 시가 이제는 나의 앞을 서서 가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모두가 무서운 일이요, 꿈결같이 허무하고도 서러운 일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수영은 전쟁발발초기 많은 작가와 함께 북한 의용군에 강제 징집됐다가 탈출했으나 서울에서 체포당해 약 25개월간 포로수용소생활을 했으며, 거제도수용소에는 약 4개월간 수용됐으며 52년 말 부산 거제리 수용소에서 풀려났는데 이때 그의 신문은 민간 억류인이었다.
시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1953)에서 거제포로수용소를 직접 언급하고 있다.
'누가 거제도 제61수용소에서 단기 4284년 3월16일 오전오시에 바로 철망하나 둘 셋 네겹을 격하고 불일어 나듯이 솟아나는 제62적색수용소로 돌을 던지고 돌을 받으며 뛰어들어 갔는지'라는 구절은 친반공포로간 극한 대결을 그리고 있다.


청마 유치환(1908~1967)은 거제가 낳은 대표적인 시인이다.
청마는 1908년 현재의 거제시 둔덕면 방하리 507-1번지에서 태어났다. 생가에는 유치환 기념관이 서 있으며, 그의 유해도 1997년 양산 백운공원묘지에서 선영인 둔덕의 모친 묘소 옆으로 이장됐다.
이제까지 청마의 출생지가 통영으로 기록된 것은, 청마의 나이 3세에 집안이 통영으로 이사를 갔고, 그의 나이 7세 때인 1914년 당시 거제군이 통영군으로 통폐합된 후 1951년까지 행정구역상 거제군(시)은 없었다는 상황과 관련이 깊다.
때문에 청마가 문학활동을 하던 시기 그의 이력난의 출생지는 통영으로 기록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청마가 거제출생이라는 자료로는, 그의 형 동랑 유치진 전집 제9권의 자서전에 '자신이 만 5세, 청마가 2세일 때 충무로 이사갔다'는 기록과, 청마의 부친 유준수의 제적등본에 1910년(단지 4243년)통영시 태평동으로 분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청마의 부인이나 유족들 또한 청마의 출생지가 둔덕임을 증언해 주고 있다.
청마는 자연인으로서, 시인으로서 실질적인 성장지는 통영이었지만, 둔덕에 대한 고향의식이 그의 시에 많이 나타나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시집 <울릉도>(1948)에 실린 <거제도 둔덕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제도 둔덕골은
팔대로 내려 나의 조부의 살으신 곳
적은 골안 다가솟은 산방 비탈 알로
몇백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마을은 언제나 생겨난 그 오로운 앉음새로
할아버지 살던 집에 손주가 살고
아버지 갈던 밭을 아들네 갈고
베짜서 옥 입고
조약써서 병 고치고
그리하여 세상은
허구한 세월과 세대가 바뀌고 흘러갔던만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뒷산 산비탈 모양
두고두고 행복된 바람이 한 번이나 불어왔던가
(......)
호연한 기풍 속에 새끼꼬며
시서와 천하를 논하는 왕고못댁 왕고모부며
가난뱅이 살림살이 견디다간 뿌리치고
만주로 일본으로 뛰었던 큰집 젊은 종손이며

그러나 끝내 이들은 손발이 장기처럼 닳도록 여기 살아
마지막 누에가 꼬치되듯 애석도 모르고
살아생전 날세고 다니던 밭머리
조부의 묏가에 조부처럼 한결같이 묻히리니
아아 나도 나이 불혹에 가까웠거늘
슬플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좁의 하늘로 돌아와
일출이경하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

약 1세기~반세기 전 거제도의 전형적인 농경사회의 모습은 물론, 특히 '사시장천 벗고 섰는 뒤산 산비탈'은 둔덕 산방산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제도 향토시인 무원 김기호(1912~1978)는 교육자로 더 알려져 있는 분으로 '섬은 섬을 돌아 연연 칠백리'로 시작하는 '거제의 노래' 작사자 이기도 하다.
시조집 <풍란>(1965)은 자연과의 동일성 추구, 이를 통한 인식의 내면화, 삶과 문학의 일치, 그 결과로서 짙은 향토정서 등을 들 수 있다.
<풍란>에서 그는 "이 섬 중 두메에서 학교를 하느라고 내 삶이 고달픔과 내 일이 쓰라림으로하여 남몰래 애타는 한위를 용하게 버티어 왔습니다. 이러한 틈새에서 '시조는 내 스승이요, 벗이요, 혈육이었음을 나는 숨길 수 없습니다."고 고백하고 있다. 무원은 삶의 틈새에서 창작에 몰두했으며, 이는 삶과 문학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연장이었다는 것을 작가 스스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시조가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자연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단련하는 그릇으로 삼았으며, 평생을 고향인 한촌에서 교육자로서 삶을 살며 이를 작품으로 형상화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대표작 <풍란>

흙내음 가시어진
절처에 도사리고

두어치 매운 몸매
망울진 사랑이여

도수날
푸른 서슬은
안을 향한 다스림

땅에 금을 그어
짓궂은 새움이나

무성한 효월 위에
우줄대는 나목이야

차라리
슬픈 응시로
이 자리를 지켜라
(풍란 3,4수)


해금강 절벽위에 비수처럼 서서 세상사 시기와 우줄거림을 거부하고 매념을 향해 자신을 다스리는 풍란을 자기 내면화(동일시)하는 모습에서 번접하기 어려운 선비의 고고한 삶의 자세를 만나게 한다. 자연과의 동일성을 통한 삶의 견결성을 드러내는 작품으로는 <갈섬><청죽><야국> 등이 있다.
무원의 유일한 시조집은 <풍란>의 69수 대부분이 거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그의 짙은 향토성을 엿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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