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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수직을 사퇴하고 일진회에 가입하다
군수직을 사퇴하고 일진회에 가입하다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4.07.15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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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은 평가에서 간단하지 않다. 한 개인의 전체 생애에서 중요한 시기와 사건이 판단이나 비평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 사람이 살아온 시대와 직업, 생각 등 여러 가지를 놓고 비판할 수 있다. 이런저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물평이지만 거제·진남(용남)군수를 지낸 고희준(高羲駿, 1878년생)은 예외다.
일찍부터 고희준은 17세에 경성 관립 일어학교에서 수학한 뒤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경성학당 일본어 교사로 있다가 관직에 올랐다. 근대 교육의 혜택을 받은 ‘귀한 몸’이 된 그는 1906년 1월 주일대사 이재완의 수행원 자격으로 다녀와서 일본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 그 훈장에 보답이라도 하듯 고희준은 같은 해 9월 “한일 양 제국의 국시(國是)를 찬조하고 양 국민의 우의를 더 가까이 노력”할 목적으로 대동협회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그 공로인지 나이 28세 1906년 11월부터 1907년 11월까지 거제군수에 오른다. 군수 재직 시절 그는 사립거제학교(지금의 거제초등학교) 설립에 참여했으나 학교 기부금 일부를 유용해 기생 홍도 집에 가서 술을 먹는 등 구설수에 올랐다. 결국 자리보전하지 못한 그는 같은 해 12월부터 1909년 5월까지 진남(용남)군수에 있으면서 인생 제2막을 시작한다.
고희준은 1909년 5월 9일 일진회에 찾아가서 회원으로 받아 달라고 여러 번 ‘간청’했다. 일진회는 고희준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군수 직에서 사퇴하고 다시 일진회에 찾아가서 간청했다. 그의 뜻에 ‘감동’을 받은 일진회는 평의회에서 회원 입회를 가결하고 총무국 교섭위원과 회칙개정조사위원에 임명했다.
더 나아가 고희준은 7월 경성 원각사에서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벗어나서 한 번 독립을 할지라도 동양의 화평과 세계의 안녕을 도모하려는데 일본을 의뢰치 아니함이 불가”함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일진회와 동일하게 한국을 일본에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희준은 10월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에 대표로 참석하고 일본 ‘합방 찬성’에, 3·1운동 참여자들에게 ‘경고문’까지 ‘충성’을 다했다.
그럼 고희준이 군수 직을 내던지고 출세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바로 ‘빵빵한 스폰서’가 존재했다. 거제군수 재직 때 그는 진해방비대 사령관 미야오카 나오키(宮岡直記, 해군 6기, 이시가와 출신, 중장예편)에게 신임을 얻었다. 미야오키는 고희준에게 군수 월급만큼 매달 활동비까지 챙겨줬다.
경술국치 직후 그는 1911년부터 1931년까지 여러 지역의 군수를 지내다가 각종 친일단체 임원이 되었다. 창씨개명 실시 이후 국민협회 상의원장을 맡고 있던 고희준은 1940년 6월 조선중앙창씨명상담소 창씨·개명에 적극 참여한다. 그의 나이 64세인 1942년까지 친일단체 간부직을 맡아서 활동하고 있었다. 고희준은 20대부터 환갑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오직 ‘친일부역’에 온 몸을 받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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