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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축조...옥산금성(玉山金城)
조선 마지막 축조...옥산금성(玉山金城)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4.06.1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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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제부사 송희성(宋熙昇)과 옥산(玉山) 수정봉(水晶峰)
◯ 송희성(宋熙昇,1827년~ ?) 자는 경호(敬鎬), 본관은 은진(恩津), 부(父)는 송관화(宋觀和)이다. 거제부사로써 1872년 고종 9년 6월 26일 임명장을 받고, 1872년 7월 26일 부임하여 1874년 7월까지 거제부사직을 수행하다가 강원도 삼척영장(三陟營將)으로 전보된다.

1875년 3월 달에는 거제부사 시절, 옥산금성 축성을 위해, 군민을 강제로 부역케 하고 거금을 갹출시켜 군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고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하여 송희성은 파직되었다.

그 해 5월 달에 장 1백대를 맞고 경상도 풍기군으로 정배(定配), 1876년 2월에는 벼슬자리에서 내치고 제 고향으로 내쫓던 형벌, 즉 방축향리(放逐鄕里)되었다. 고종 16년 1879년 6월 25일 순천영장(順天營將)으로 등용되었으나 7월 16일 곧 하직한다. 고종 17년 1880년 12월 29일 오위장(五衛將, 정3품)으로, 뒤이어 대구영장(大邱營將), 1882년 9월 14일 혜산첨사(惠山僉使 정3품)로 재임하다가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조선말기 무관으로써 해안방위의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고 실천했으나 세계열강의 무기체계와 발전된 시대 상황을 몰랐던 전형적인 조선시대 舊무인이었다.

◯ 거제도에서 마지막 쌓은 성(城)이 옥산금성이다. 계룡산 줄기가 남으로 뻗다가 작은 서편 산줄기를 하나 남기었는데 그 끝에서 아름답게 솟아났다고 옥산(玉山)이라 했다. 또한 거제면 동쪽 계룡산 밑 정상에 위치한 이 산성은, 수정같이 솟아 있다하여 수정봉성(水晶峰城)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산성 서쪽 성문 아래 바윗돌에 '옥산금성(玉山金城)'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정식명칭은 ‘옥산금성‘이다. 지금은 성터만 남아 있어 옥산성터(玉山城址)라고 부른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0호(1974.02.06)로 지정되어 있고 성의 둘레는 778.5m, 높이 4.7m, 폭 3m로, 조선조말 고종 10년(1873년)에 거제부사 송희성이 거제부민을 동원하여 쌓았던 것으로 성의 직경은 40~80cm의 장방형 자연석을 끝을 가지런히 하여 산 능선의 굴곡에 맞추어 타원형으로 쌓아 올린 테뫼성으로 성내의 요소마다 누각(樓), 무기고, 호(壕), 연못(池) 등의 방어진으로 구축하였으며 남쪽과 서쪽 성문은 'ㄱ'자형으로 만들고 돌층계를 마련하여 성안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 옥산금성축성기(玉山金城築城記)에 따르면, 1873년 3월 6일 처음 축성을 결정했으며, 3월 15일 준비를 시작하여, 5월 달에 공사를 시작해 1873년 10월 15일에 성(城)이 완성되었다. 짧은 두서너 달 만에 거제도 전 지역에서 축성비용을 마련하였고 실제 공사는 5달 보름 정도 걸렸으며, 총 비용이 2만 냥 정도 되었으니 거제부 관군민의 고충을 짐작케 한다.
▶ 당시 1마지기에 1냥 정도 거래, 2만 냥은 2만 마지기 400만평 값이 들었다.

◯ 경상도여지집성(慶尙道輿地集成) 거제군읍지성지조(巨濟郡邑志城池條) 水晶山城[주:在郡東北五里癸酉新築] 수정산성은 재군 동북 5리 1873년 축성. 부사 송희성 1873년 신축, 우물 1개 있다[府使宋熙昇癸酉新築內有一池]

 


2) 기성관 거제객사에서(거제면 기성관) 한시(漢詩)
◯ 거제부사 송경호(희승) 거제인과 더불어, 이후와 거제 객사 기성관에서 함께 시를 읊는다.[與宋巨濟景鎬(煕昇)共賦 于李侯寓舘] / 황재영(黃在英, 1835~1883), 대계유고(大溪遺稿)와 구전선생문집(苟全先生文集).
悲歡離合捴成詩 슬픔과 기쁨, 헤어짐과 만남, 모두다 시를 이루어
凉夜城西剪燭時 시원한 밤 성곽의 서쪽에서 촛불이 다타 꺼질 때까지 읊조린다.
世路無端多貝錦 세상에서 겪는 일엔 무단히도 조개무늬 비단이 많았는데
生涯隨處寄鷦枝 한 평생 가는 곳마다 뱁새 가지에 기대는구나.

거제부사 송희승과 거제도를 방문한 영남의 학자 황재영이 기성관 객사에서 밤이 이슥토록 함께 시문을 읊조린다. 한평생 화려했던 시절과 현재 느끼는 감회를 적은 한시이다.

◯ 송령(송희승)이 귀양살이 가면서, 중산재에 머물며..[宋令 以謫行 留中山齋]
酒因美品澆胸快 술로 인해 품위가 아름다워지고 가슴 적셔주니 즐거운데
琴遇良師下指遲 거문고 타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 아랫사람에게 지시해 늦어졌다.
小白㴱㴱星斗朗 소백산이 깊고 깊어 백두칠성 또랑 한데
風流誰遣別人知 부는 바람 누가 보냈는지 이별한 이는 알겠지.
송희승이 경상도 풍기군으로 귀양 가던 소백산 중산재에서 다시 재회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했다.

위 한시를 적은 황재영(黃在英)은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응호(應頀), 호는 대계(大溪)이다. 아버지는 승지 인하(仁夏)이다. 1883년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하였다. 영남의 학자 가운데 실천적 학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거(居) 풍기(豊基) 백동(白洞), 류정재(柳定齋)의 문인, 1883년 천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제수되었으나 취임치 않았으며 우탁(禹倬)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을 청원하는 팔도유생대리소(八道儒生代理疏)를 올렸으며 전국의 유명한 학자와 칠정(七情), 이기설(理氣說), 천문(天文), 역법(易法)등을 문답하여 폭이 넓고 깊은 학문을 이룬 학자이다. 특히 독가어(讀家語)는 자신의 성찰(省察)을 통하여 반성하며 올바른 자세를 취하는 진취문으로 문집(文集) 7권4책에 전한다. 『대계유고』는 그의 조카 병흠(炳欽)이 흩어진 유고를 수집하여 간행하였다.


3) 옥산금성축성기(玉山金城築城記)
동치 12년 1873년 3월 15일 준비를 시작하여, 1873년 10월 15일에 성이 완성되었다. 거제부사 송희승[同治十二年 癸酉三月 十五日 設 府使 宋熙昇. 同治十二年癸酉十月十五日 府使 宋熙昇 記] / 실제 공사는 5달 보름 정도 걸렸고 총 비용이 2만 냥 정도 되었다.

절도 해읍인 거제도는 반드시 험한 지형에 의지한다. 임진난 이후 급히 보전하려 성을 쌓았으나 고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탄식하고 한탄함이 여러 해가 되었다. 반드시 조정의 결정을 받들라고 각 도(道)에 매번 권하면서 새것과 헌것을 실낱으로 꿰매 입어라 한다. 다른 사람 밑으로 들어감을 남에게 행여 뒤질세라, 이 고을에는 이러쿵저러쿵 논란이 많고 축성을 원한다고도 한다. 비록 부사의 뜻이라 할지라도 준동하는 이가 없이 따랐다. 이제 민정(民丁백성)을 부르니 뜻밖에 수천 명에 이르러, 앞서기를 다투다 비로소 뒤따른다. 곧 계유년 1873년 3월 6일이었다. 다섯 달 그믐이 되기 전에 공사가 끝나게 되었고 산의 성(城)이 높이 솟았다. 이 같은 뛰어난 형승에 기뻤다. 그리고 옴이 없지는 않았으나 사영(舍營)을 건설하고 각자 스스로 재물을 내놓았다. 각기 스스로 우물 난간을 정하고 한마음으로 시작하여 그 후에 곧 마칠 수가 있었다. 5월 공사를 시작해 10월에 완성했다. 어찌 조정의 덕화(德化)로 길러진 공적이 아니겠는가? 여러 사람들의 즐거움인 바, 쇠잔한 판국에 큰 힘으로 이제야 일이 완성되었다. 서로 도와가며 성을 축성하는데 드는 비용, 지방군 별포군의 일로 남는 이익, 이전(利錢)이 1500냥 이고, 거제유림이 돕기를 원해 모아 온 돈이 3000 냥, 거제향소의 직원인 좌수 별감 등의 무리들이 합심해 모아 온 돈이 2700 냥, 거제부사가 보탠 돈 1700 냥, 합전(合錢) 8900 냥이었고 여기다 관청의 돈 3000 냥이 있었다. 관청에서 각 마을마다 나누어 분담한 군대에 필요한 물자가 크게 1000석 300냥 이었고, 각 마을에서 나누어 물건을 받아 놓은 바, 군대에 필요한 물자가 크게 200석 5600 냥이나 되었다. 남쪽 성 아래 논(畓), 매마지기로 준 돈이 20 냥, 합이 280 마지기를 사 놓았다. 특히 대포를 성안에 갖추길 부탁하고 선비의 양식도 겨우 준비하게 되었다. 지키고 보호하는 절차에는 일정한 방법이 있다. 여러 사람들이 건설하는 능력은, 사유에 상관없이 노력에 보답하는 것이다. 집을 짓는 사람, 감독하는 사람, 기술자 등의 성명을 쭉 적어서 널빤지에 새겨 넣고, 책자에 적어 보관하고 관청의 들보에 게시하였다. 오줌 물도 감추듯 했다. 이로써 아름다운 마을의 사람들로 인하여 넉넉히 갖추어지고 기술자(장인)도 한마음 되니 사람들이 다시 와보고는, “자손들을 완전하게 지키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오랜 세월동안 감독한 자에게 표장(表獎)하게 하였다.

[ 絶島海邑 必有所恃險 而任辰以後 奉遑築城 衆情嗟嘆積有年矣 會奉朝廷節勸各道 繘繕新舊 恐在人後 此邑物議 亦曰願築 雖以知府之情 率可無蠢動 今招民丁 不期至千數 爭先始後 卽癸酉三月六日也 未到五晦 得竣 城山埈高 怡有形勝如此 而不得無癣舍營建則各自出財 各自幹牧同心始後 乃津其終 五月施役十月落成 豈非朝廷以德化育養之功哉 衆心所樂 殘局巨力 今旣告訖 寶有‘缺’護之築 別砲道利錢 一千五百兩 士林願助收來錢三千兩 鄕中判戶錢二千七百兩 府使添補錢一千七百兩 合錢八千九百兩 內三千兩 分給各里收納 軍需太一千石三百兩 亦爲分給各里受納 軍需太二百石五千六百兩 南城下畓 每斗落二十兩給價 合二百八十斗落買給 別砲以爲乇‘缺’城哉 粮士僅得備矣 守護之節次‘缺’有定式 而設力衆人酬勞無由故 建舍之人 監董之人 工匠之人 列錄姓名 剖刺‘缺’板 揭于衙樑膳戢冊子 藏于洛尿後 以花鄕之人 亦恢(恹)之仝匠之 人復至 子孫植處十護 以爲表獎永年督者 ]

[주1] 동치(同治) : 중국 청나라 목종이 임금의 자리에 있을 때 붙인 연호. 서기 1862년부터 1874년까지이다.
[주2] 시험(恃險) : 험한 지형을 의지(依支)함.
[주3] 준동(蠢動) : 벌레 따위가 꿈적거린다는 뜻으로, 불순한 세력이나 보잘것없는 무리가 법석을 부리는 것.
[주4] 사영(舍營) : 숙영(宿營) 방법의 하나. 군대가 병영 이외의 건물을 이용하여 자고 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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