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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시인의 '시를 걷는 오늘' 3
김성희 시인의 '시를 걷는 오늘' 3
  • 김성희 기자
  • 승인 2018.02.01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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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일함 동백꽃

향일암 동백꽃

양곡


말갛게 정신을 비운
겨울의 끝
사랑도 팔고사는 뒷골목을 지나
적막한 삶의 관음(觀音)
피를 토하는
동백꽂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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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겨울이다.
희게 벗은 나무들의 떨림이 목숨의 깊은 전율로 느껴진다. 생명이지만 생명이 아닌 듯한 진공상태에서 말갛게 정신을 비우고 나면 인간의 오욕이 씻겨져나갈 것 같다. 겨울의 끝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지리적으로 없는 공간이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어딘가의 끝을 향한다.

그 끝자락은 현실 너머의 전혀 새로운 공간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사랑도 영혼도 팔고 사는 저자거리를 한참 지나서 오감을 자극하는 혀의 미끄러움 을 급히 지나서 막다른 해안가, 적막한 파도소리가 삶을 관류하는 심층의 해원이다.

그 곳은 푸른 정신이 되살아나는 '내'가 관음보살이 되는 곳이다. 삶의 불순물들이 가라앉고 엉킨 마음이 풀리는 맑은 도량에서 버리고 온 나와 대면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나 인간의 삶은 요동치는 분화구, 잠시 고요했다가 이내 이미지들의 충돌처럼 파도의 박동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쉼이 끝난 맑은 도량의 층계 아래에는 심장을 닮은 붉은 동백의 파도다.

목숨의 물결이 찬란하다. 이승의 개똥밭이라도 삶은 가치 있고 서릿발처럼 빛나기 때문이다. 겨울의 끝에 봄이 있듯이 우리 마음이 헤매인 끝에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차갑고 맑은 환기의 창이 있는 것이다.

 
김성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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