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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원종태 시집 <빗방울 화석>
<서평>원종태 시집 <빗방울 화석>
  • 김성희 기자
  • 승인 2017.12.21 16: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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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따뜻한 슬픔의 근원을 노래하다

 
원종태 시인이 첫 시집 풀꽃 경배에 이어서 두 번째 시집<빗방울 화석>(푸른사상시선 84)을 출간했다.
시인은 풀꽃에 대한 경배에서 좀 더 다채롭고 좀 더 낯선 사물과 풍경들에게 더 깊은 경배를 하기위해 몸을 최대치로 낮춘 작고 투명한 빗방울이 되었다. 그래서 빗방울의 겸허한 마음으로 천지만물을 경배하려는 것이다. 원종태 시인 두 번째 시집 <빗방울 화석>에서는 특히 자연과 사람의 상호 텍스트성의 가치를 다루고 있다.

시인이 호명하는 나무와 풀꽃들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존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실에서 맑고 따뜻한 위안으로 빛난다. 시인은 빗방울 렌즈에 맑은 슬픔을 피사체로 잡고, 순수한 언어로서 피사체와의 명료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순수한 언어 안에서 시인의 영혼은 유목민이다. 드넓은 삶의 초원에서 밤하늘별을 바라보는 낭만과 그 별을 헤아리는 욕심 없는 삶을 지향하는 보헤미안이다.

무한대의 세계를 주유하는 빗방울, 그러니까 대자연의 들숨으로 스며들어 생명의 화석이 되는 빗방울이 시인의 마음이다. 시인의 이런 지순한 사유들은 이동식 움막 안에서 물질의 잉여도 축적도 없는 마치 낮은음자리 ‘도’처럼 정중한 울림을 준다. 정중한 울림뿐만 아니라, 시인의 시편들에서 시로서 세상의 부조리를 벼리려 하는 칼날의 번득임도 있다.

그러나 그 칼날의 언어마저도 따뜻한 의지와 부드러운 결의로써 맑은 영혼의 슬픔이 되고 만다. 관조하는 것보다는 행동하는 시인의 언술은 아이러니와 역설, 시적 긴장감으로 시 읽기를 방해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원 시인의 시는 햇살 담론이다. 시인의 따사로운 시선에 맞닿은 사물들은 부드럽고 슬픈 질감의 생생한 이미지로 응답한다.

때로는 그 슬픔들이 지나가는 잎 넓은 시적현실 사이사이 깊고 푸른 삶의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이 비록 아픈 현실일지라도 시인의 언어에서 여과된 현실은 이상하게 따뜻하다. 게다가 시인은 세상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등불을 비추는 사회의 공기, 신문 발행인이고 환경운동가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는 얼음 같은 각성과 반성적 사유로 요동치는 삶의 현장을 담고 있다.

늙은 소는 앞세우고
젖먹이 하나 등에 붙었다
몸뻬바지에 닿을 듯 말 듯 아이 하나
긴 목 위에는 양동이를 이었는데
넘치는 물은
흔들리는 바가지로 누르고
논두렁길을 초승달같이 저어가는

천년에 다시 한 번 볼 수 있을까

징검다리에 주저앉아
떠내려간 고무신 한 짝에 울 때
물 위를 걸어서 건져오던 여자
아이들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데
하늘을 걸어
늙은 나무에 걸린 꼬리연을 데려오던
절세의 고수

「절세의 고수」전문

원종태 시인의 시적 대상은 먼 꿈이나 먼 환상이 아니다. 우리 삶에 부대끼는 현실, 혹은 현실의 한복판에 선 사람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을 새롭게 인식하고 스스로 변화를 꿈꾸게 하게끔 우리에게 보내는 따뜻한 연서다. 시인은 일상적 언어로 시의 덧창을 연다. 열

린 창으로 들어가면 거기 시의 화자는 삶을 관류했던 소중한 기억들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듯하다. 「절세의 고수」 에서는 신을 둘 수 없어 대신 어머니를 두었다는 말이 떠오른다. 떠내려간 고무신을 물을 걸어서 건져오고, 꼬리연을 데려오는, 늙은 소 앞세우고 젖먹이 등에 붙이고, 몸뻬바지에 달라붙은 아이와 보폭을 맞추고, 머리에 물동이를 인 어머니는 능력자다.

신은 아니지만 어머니라는 존재 그 자체에 삶이 압도당한다. 강하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모성을 가진 절세의 고수는 지금 부재중이다. “시인은 천년에 한번 볼 수 있을까”라는 말로써 메울 수 없는 간극이나 결핍을 치환하고 있다.

어디 하나 밑줄 그을 곳이 없었다
오래토록 그려오던 옛사랑의 편지처럼

능선은 솟아오르는 것을 누르고
밖으로 잔물결 하나 내보내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인 줄 안다는 듯

저녁산은 어깨에 붉은 화살을 맞고
뼈 긁는 소리 하늘에 자욱자욱 토해냈다

해와 달이 묵화를 그리듯
사랑도 닳는다, 닳아버려서
어디 하나 밑줄 그을 곳이 없어졌다

밤하늘에 기댄 고사목 하나
제 몸을 새와 짐승의 먹이로 주고
입적했다 지리산 어디였다

'지리산' 전문

주검 앞에서 ‘죽음’을 찬미할 수 있는 것은 자연 밖에 없다. 우주의 질서를 순환하는 봄날의 꽃들도, 생명의 단단한 내핵을 열매로 내주던 가을도, 몸서리치는 긴긴 겨울눈발도, 이름 모를 행복도, 이름 모를 불행도, 아무것도 밑줄 그을 것이 없는 지리산이다. 지리산 그 어디쯤에서 사랑이란 추상명사는 한낱 인간의 감정에 닳고 닳아버리는 관념에 불과하다.

해와 달이 묵화를 그리듯이 자연은 시인을 초탈하게 만든다. 시인이 지리산에서 살펴본 고사목 하나는 고승의 입적과 같다. ‘능선은 솟아오르는 것을 누르고, 밖으로 잔물결 하나 내보내지 않았다’ 지리산의 장엄함을 압축적으로 묘사했다. 자연의 숭고미는 인간의 보잘것없는 욕망을 탈각시키는 것을 시인은 예리하게 관찰한 것이다.

봄비 오신다고 전화가 왔다
파전에 막걸리 마시던 때가 생각 나네요
함석지붕을 두드리던 빗방울 소리가 건너온다
꽃 보러 산에 계곡에서 봄비 만났다
검은 소나무에 등을 기댄 채
캄캄한 비속에서 비를 피한다
세월호가 올라왔어요
혹시 보고 있나요
그 큰 배가 여기저기 구멍에서
바닷물이 줄줄 새어나와요
나는 구멍이 몇 개밖에 없어서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부분

우리 현실의 부조리에 화자는 한동안 시도 잃고 밥맛도 버렸다고 한다. 화자는 구멍이 몇 개밖에 없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봄날에 꽃과 같은 어린 생명들의 유실에 대해 미안함에 속으로, 겉으로 울고 있는 것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오작동으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미안하다고 우는 사람은 분명 시인들일 것이다. 시는, 또는 시인은 삶의 현장에서 얼룩으로 남는 오점에 대하여 무한히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말 못하는 짐승이 세상을 구원하리라
말 못하는 짐승의 말을 전하는 사람들이
입 없는 산의 노래가 자신을 되찾으리라
꽃은 꺾을 수 없는 절벽에서 피고
별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반짝이고
산은 오를 수 없는 곳에 솟아 있네
정상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산은

정상이 아니지 정상에 올랐다면
왜 또 힘들여 다시 오르겠는가
정상은 어디에도 없는 것
절벽에 핀 꽃처럼 어린 왕자의 별처럼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고
진정한 것은 닿을 수 없는 것

「설악산을 그냥 내버려 두라」부분

시인이 바라보는 어떤 대상의 가치는 우주론적 가치이다. “아직 덜 깬 아침 이슬”, “새벽안개”, “그대의 이마를 물들이던 저녁노을”은 지극히 개인의 정서이면서도 공유 가능한 사태들의 공간에 있는 것이다.

또한 숲의 맑은 공기, 높은 산 정상의 기백, 태초의 기억을 간직한 대자연의 경이로움은 공적으로 교감이 가능한 사태들의 공간에 있다. 우리 삶은 자연과 상호보완적이다. 시인이 탐색하는 사물은 우주론적 가치에 입각한 것이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고, 진정한 것은 닿을 수 없는 것” 이것은 시인과 세계 사이의 그리움일 수도 있고, 자연과 사람의 경계를 허무는 마음의 작용일 수도 있다.

이렇듯 시인은 사람이 자연의 일부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을 지향한다. 나와 타자를 동일시하는 깊은 호흡이 삶의 속도를 늦추고, 문명이 조금 권태로울 때, 모든 생명의 가치가 빛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가슴에는 나 아닌 것들에도 사랑과 연민을 비추는 등불이 환하다. 그러므로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리듬을, 그 리듬 곁가지로 피어난 삶의 투명성을 추구하는 원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은 독자의 가슴에 빗방울 만한 화석을 남길 것이다. 김성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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