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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걷는오늘>12 '소녀' 김성희 시인
<시를걷는오늘>12 '소녀' 김성희 시인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8.04.27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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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김성희

태초에 알이 있었다
둥글고 물기 많은 여유
아무도 닮아있지 않고
무엇에도 물들지 않아
너는 귀가를 서두르지 않는,

무지개는 정말 찬란했을까
찬란하다고 믿고 싶었을까?
먼 빛 파랑새를 좇아가는
뒷모습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내 소녀와 흡사한 소쉬르의 기호학
드레스같이 레이스같이 자의적인 흰 빛이
들장미를 보았던 한 아이는 나였고
파우스트처럼 늙은 후에도 나였고
만사에 부는 바람으로 계약을 맺는 삶에
너는 귀가를 서두르지 않는,

만지면 형체가 없어지는 세계의 끝에서
아무도 모르면 사실이 되는 단추를 알고
아무 말이나 나를 증명하는 나선의 계단에서
아직 너는 귀가를 서두르지 않는,

쉿! 들추면 사라지는 순수
언제나 슬프게 내 눈은 너를 바라본다


김성희, 2015년 계간 < 미네르바>여름호로 등단, 2017년 ‘잠’, ‘열쇠’,’그늘’ 등의 작품이 ‘신진조명’을 받았다.

 


<감상>
김성희의 시 ‘소녀’ 의 출발은 몹시 환상적이며 신화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소녀’의 짧은 노래가 사라진 후 뒤를 돌아보며 삶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준비한다.
인생이란, 시간이 소원을 들어주면서 우리의 젊음을 앗아가는 것이고 마치 그 양상이 오노레 드 발자크가 검 대신 펜으로 쓴 소설 < 나귀 가죽 >에서 골동품상 노인이 라파엘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횡포를 부리는 것과 닮아 있다. 그러나 어쩌랴 소멸 또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그렇다면 시인은 쉬지 않고 일어나는 인간의 희비극 그 일상적인 넋두리를 왜 하는가? 하지만 시인의 힘있는 손길을 거친 후 뜻 깊은 담론을 담은 시 ‘소녀’가 탄생했다.
시인은 오래 전 먼 곳으로 달아난 소녀의 시간을 불러내어 독자에게 들려준다. 그리하여 빛나는 상상력이 불러낸 언어들의 소풍에 가슴이 떨리고 눈이 부실 지경이다.
“태초에 알이 있었다” 아이의 탄생은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의 처음과만나는 순간 신화가 된다. 여기서 시인은 옛날로 되돌아가 나였던 ‘소녀’를 촘촘하게 복원시키는데 성공한다. ‘알을 깨고’ 나온 아이가 세상과 처음 만나는 시간은 성스러운 존재임에 분명하다. 아이는 자라 소녀가 되고, 세상을 밝히는 무지개가 된다. 꿈꾸는 희망이며 순수이다. 파랑새를 쫓아가던 소녀는 어느 날 시간의 햇빛을 따라 감쪽같이 사라진다. 소녀 없음이다. 소쉬르에 의해 정의된 언어의 기호학은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고 있는 것’이 이미지와 개념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기호화 하여 ‘소녀의 향기’로 희석시켰다. 향기는 엷어졌다. 그 순수의 가치는 값으로 따질 수 없다. 젊음의 가치는 희소성이 절대적이다. 젊음과 희망은 한 몸이다. 생의 가장 찬란한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징검다리를 건너듯 껑충 건너버린 소녀의 시대는 이제 너무 멀리와 버린 날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우겨본다. “아직도 들장미를 보았던 한 아이는 나였다”고 소리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메피스토텔레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나쁜 계약을 맺은 파우스트처럼 소녀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젊음을 앗아가는 태양과 일방적인 계약을 맺은 듯 시간의 물결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너무 멀리와 버린 날들이지만 아직도 지나간 소녀를 끌어당겨 나에게로 견인하고 싶다. 그 태도는 건강하고 옳다.
거울의 방에서 사라진 내 소녀는 늙음이란 의미에서 바라보는 환청 같은 것, 누구에게나 지나간 소녀는 꿈과 희망의 상실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애써 부정할 필요가 있다. 아직은 귀가를 서두르지 말자.
“쉿! 들추면 사라지는 순수” 이 신비스런 보석은 절대로 들추지 말 것.달아나는 소녀는 붙잡아 봉인해두어야 할 금기./ 옥명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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