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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제도 개혁 없인 착한 민주주의도 없다(종결)
선거제도 개혁 없인 착한 민주주의도 없다(종결)
  • 윤양원 기자
  • 승인 2018.03.02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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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선택지가 없다

 선거제도 개혁 없인 착한 민주주의도 없다(종결)

 

....(3편에 이어)

 앞서 3편에서 의원 정수의 대폭 확대(79석 증원으로 전체 379석)에 대한 다수 유권자의 동의를 얻어내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이며, 또한 그것이 우리 사회 전체에 유익할 것이냐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한 채 글을 마무리 했었다.

 그래서 이번 장에선 왜 의원 정수를 확대해야 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긍정적 시너지를 발휘할 것인지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끝으로 이 길고도 지루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

 먼저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린 여태까지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언제 우리 국회가 다수 국민이 원하는 방향을 향해 자발적으로 움직였던 적이 있던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수의 유권자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지금의 선거제도 하에서 민의를 역행하는 정치세력들을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저지하긴 어렵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그 이유가 유권자의 투표의도와 도출된 결과 사이의 불일치에 있다는 걸 앞선 글에서 누차 강조했다.

 사실 지난겨울 우리가 들었던 촛불이 박근혜란 혼용무도(昏庸無道)한 권력자 하나만을 단죄하는 데 그쳤단 사실만 봐도, 그들(?)의 탁월한 생존전략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지경이다.

 혁명이란 제도의 한계 바깥에서 일어나는 제도개혁 운동이다. 그래서 촛불혁명의 정치사적 의미가 한 번의 자위행위를 통한 대중의 집단적 자기위안으로 격하되어, 제도적 개혁에 대한 가시적 성과도 없이 서서히 동력을 잃어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우려한다.

 우린 촛불혁명을 통해 집권 세력만을 교체했을 뿐, 제도개혁을 통한 사회적 변혁을 성취하는 데엔 실패했다. 정확하게는 그 정도까지 가기엔 각자의 삶이 너무 힘겹고 고달팠단 표현이 맞겠다.

 필자의 생각엔 아마도 대의민주주의의 존재 가치가 혁명적 변화에 대한 열망과 개별 유권자들의 고달픈 삶의 중간 어디쯤에서 생기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선 줄 건 주고, 받을 수 있는 걸 취하는 게 유효한 전략일 가능성이 높다. 현실에서의 정치란 대화와 타협의 산물이란 사실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물론 우리가 제시한 패를 그들이 순순히 받을 것인지도 확실치 않다. 사실 기득권 세력들이 원하는 건 의원 정수의 축소도 확대도 아닌, 그냥 지금 상태의 유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에게 축소는 현존하는 실질적 위협이 될 것이고, 확대는 미래의 장기적 위협이 될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의원정수의 축소보단 확대가 그나마 현실적 대안일 가능성이 높으니 만큼, 사실상 지금의 우리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의원 정수 확대는 권력분산을 향한 첫 걸음

 다음은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는 일이 사회적으로 유익할 것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다. 이 물음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그렇다’ 이다. 다소 철학적 해석일 수 있겠으나, 권력의 본질은 집중되면 부패하고 나눌수록 투명해지는 것이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 이유로 국회의원 정수를 줄여야 한단 다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주장의 근거엔 현상에 대한 직관과 당위만 있지 방향에 대한 비전과 철학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주장엔 구체적 해법이란 게 없다. 다시 말해, 줄이면 얼마나 줄이는 게 적당하고, 또 어떻게 줄일지에 대한 구체적 대안이 없단 뜻이다.

 이 주장을 좀 더 확대하면, 의원 정수를 계속해서 축소하다 보면 결국 그 정점엔 한 사람의 지배자만 남게 되는 우스꽝스런 결론에 도달한다. 그게 바로 독재(獨裁)를 뜻한다는 건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듯하다.

 그래서 국회의 비효율이 싫어 독재(獨裁)를 용인한다면, 이거야 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주요국 의원 1명당 인구수>

 

 한편 필자처럼 ‘의원 정수를 늘여야 한다’ 주장하는 이들의 이론적 근거엔 직접민주주의란 정치 철학이 깔려있다.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을 계속해서 나누다 보면 점점 많은 사람이 작은 권력을 공유하게 될 것이란 게 이 주장의 근거다.

 결과적으로 다수 대중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지면, 그것이 바로 직접민주주의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단 생각이다.

 어떤가? 아무래도 무자비한 독재보단 귀찮고 성가신 민주주의가 더 낫지 않겠는가?

 

 합리적이고 냉정한 선택이 필요한 때

 한편으론 30년 전에 비해 대폭 늘어난 우리 정부의 예산 규모와 법안처리 건수만 보더라도 의원 정수 확대는 불가피한 상황으로 보인다.

 <13대 국회와 19대 국회의 비교>

 

 보시는 바와 같이 지난 30년 동안 우리 국회가 처리하는 예산의 규모와 법안 건수는 수십 배 늘었다. 하지만 의원 정수는 299명에서 300명으로, 1명이 늘어나는 데 그쳤단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필자가 주장했듯 기득권 세력의 이익이 의원정수의 축소도 확대도 아닌 현상의 유지에 있단 사실을 잘 설명하는 근거라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의원 정수 축소를 주장하는 측의 논리적 근거는 무너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주장엔 기득권의 이익을 강화하고 소수의 권한을 더욱 확장시키는 논리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냉정하게 이익과 손해를 잘 따져야 자기 발등을 스스로 찍는 일이 없을 것이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의외로 우리 주변엔 그런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국회의 비효율을 방치한 채 의원 정수만 늘릴 순 없어

 하지만 이런 주장에도 넘어야 할 산은 분명 있다. 우리 정치와 국회의 비효율을 유지한 채 의원 정수만 늘이잔 주장에 동의할 유권자는 많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대안은 전체 비용을 현재 수준에서 동결시킨 상태에서 의원 정수를 늘리자는 것이다.

 <1인당 GDP 대비 국회의원 세비 비교표>

▲ 주) 자료출처 : 2013년 국회 사무처

 위 표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 국회의 의원 세비는 타국의 1인당 GDP 수준과 비교할 때 세계 최고다. 물론 여기에 8명의 유급 보좌관까지 포함하면 비교 자체가 의미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실력은 조기축구회 수준이면서 대우는 프리미어리그급인 우리 국회의원의 보수와 보좌진 축소를 먼저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회의원 세비는 1인당 GDP의 3.5 배 이하로 묶어 국민소득과 연동시키고, 보좌진은 4명 정도로 축소해도 국회의 기능엔 문제가 없을 것이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부족한 입법기능의 전문성은 증원되는 국회의원들이 나누면 될 일이다.

 그래서 주말과 밤낮도 없이 초과근무(?)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의원님들의 행복권과 휴식권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본회의장에서 졸고 있는 의원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격무를 줄여줘야 한단 생각이 드는 건, 굳이 휴머니즘을 앞세우지 않더라도 보편적 인간이면 당연히 가져야 할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아닐까 싶다.

 비꼬는 것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그들은 보통 사람의 서너 배 이상을 일한다. 다수의 유권자들이 놀고먹는다 생각하는 그들은 필자를 포함한 우리 중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란 사실을 부정해선 안 된다. 다만 그들의 일에 사익(私益)과 공익(公益)이 혼재되어 있단 사실만 뺀다면, 필자의 주장은 거의 사실에 가깝다.

  

착한 민주주의 원한다면 잘못된 선거제도부터 고쳐야

 4회의 짧지 않은 글을 통해 선거제도 개혁의 중요성을 언급했고, 현행 선거제도의 대안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나름의 논리를 들어 설명했다.

 하지만 선거제도의 기술적 복잡성과 논리적 설명의 난해함, 그리고 필자의 표현이 부족하여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바란다.

 다만, 끝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가 아니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선택한 이 미완의 정치제도가 대의민주주의란 구체적 실천 양식을 통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정착되게 하려면, 그 중심에 좋은 선거제도가 있어야 한단 사실에 대한 유권자의 인식이 필요하다.

인식 없는 의지가 있을 수 없고, 의지 없는 행동은 불가능한 때문이다.

 부연하지만 좋은 선거제도란 유권자의 투표 의지가 의석수에 잘 반영되게 하는 제도다.

 그래서 6.13 지방선거와 개헌이란 국가 중대사를 앞둔 지금, 필자의 글을 통해 독자들 모두가 선거제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계기가 되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결국 착한 정치는 착한 사람이 아닌 착한 제도가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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