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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선거제도 개혁 없인 착한 민주주의도 없다(1)
<기고>선거제도 개혁 없인 착한 민주주의도 없다(1)
  • 윤양원 기자
  • 승인 2018.02.05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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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양원 거제녹색당 대표

헌법 개정 중요하지만, 선거제도 개혁이 더 급해

 
얼마 전, 개헌의 필요성과 바람직한 개헌의 방향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오늘 다시 펜을 들게 된 이유는 개헌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가 바로 선거제도 개혁이란 생각에서다.

필자가 선거제도 개혁이 개헌보다 중대한 문제라 주장하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헌법이 한 국가의 운영체계, 즉 ‘OS(Operating System)’라면, 개별 법률은 그 체계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애플리케이션(application), 즉 ‘앱(app)’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헌법과 개별 법률의 관계를 스마트폰에 비유하자면, 아무리 훌륭한 헌법(OS)이 있어도 그 헌법의 가치를 실현해 줄 좋은 법률(app)이 없다면, 그건 유용한 ‘앱’도 없이 값만 비싼, 스마트하지 못한 스마트폰에 불과할 뿐이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비싼 돈을 들여 스마트폰을 사는 대신, 그냥 통화기능만 있는 2G 폰을 쓰는 게 훨씬 더 나은 선택이 되지 않을까?

한편 선거는 국가운영의 전반적 체계를 설계하고 개별적 운영 규칙인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가진 집단을 선출하기 위해 유권자가 행사할 수 있는 최종적 권력의 이양(移讓) 절차다.

하지만 이 권력의 ‘양수양도 계약’에서 양도인이 양수인을 특정할 수 없다면, 그건 본질적으로 이 계약이 정상적으로 성립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효력 없는 계약이 될 가능성이 높단 뜻이다.

그래서 잘못된 선거제도는 본질적으로 국민이 양도한 권력의 양수인을 특정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그 권력의 사용한계 또한 모호하게 한다. 이것은 현행 선거제도가 외관상으론 절차적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론 겉만 번지르르한 요식행위에 그쳐, 이를 통해 국민의 권력이양 행위에 대한 법률적 정당성만 제공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단 의미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현행 선거법은 양도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작성된 불공정 계약서다. 물론 이 계약의 본질적 모순을 법률 전문가가 아닌 일반 국민들이 간파한다는 건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선거법의 복잡성과 법률적 기술(記述)에 대한 이해의 난해함 때문이다.

그래서 현행 선거제도의 문제와 그 개선 방향에 대한 필자의 몇 가지 생각을 지면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選擧)’

‘선거’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정한 조직이나 집단의 구성원이 그 대표자나 임원 등을 투표 등의 방법으로 가려 뽑는 행위’라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선거를 위해선 일정한 집단이 존재해야 하고, 대표자가 되고자 하는 후보가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투표란 실질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

이런 실증적 구성요건에도 불구하고, 우리 헌법 제41조는 선거의 기본원칙을 명문화된 규정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게 바로 선거의 4대 원칙인 ‘보통선거, 직접선거, 평등선거, 비밀선거’다. 경우에 따라선 여기에 ‘자유선거’를 포함시켜 선거의 ‘5대 원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한 국가의 핵심적 운영체계인 헌법에 선거의 절차와 방식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을 부연하여 명시한 이유는, 민주주의 제도의 운용에 있어 선거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선거 없는 민주주의는 공허(空虛)하고, 민주주의 없는 선거는 맹목적(盲目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린 선거를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른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시작과 끝이 바로 선거란 의미다.


위헌(違憲) 판결 받은 선거제도

 
하지만 우리 선거제도는 국가 최상위 규범인 헌법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위헌(違憲)’일 가능성이 높단 이야기다. 혹자는 이런 필자의 주장에 “그게 뭔 황당한 소리냐” 반문하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2014년 10월 30일 우리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는 “최대 선거구와 최소 선거구의 인구 편차가 3배에 달하는 현행 선거구 획정안은 위헌”이라 판결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2015년 12월 31일까지 현행 3대1인 선거구별 인구 편차 기준을 2대1 이하로 개선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국회는 그 시한을 넘겨 2016년 3월 2일이 되어서야 위헌적 선거구 획정안을 개정했다. 한마디로 두 달 동안 대한민국 국회는 위헌인 상태로 운영되고 있었단 의미다.

법을 제정하고 솔선하여 이를 지켜야 할 입법부가 최상위 규범인 헌법을 위반하여, 위헌인 상태로 운영되고 있어도 이를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다. 시쳇말로 ‘웃프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다”라 강변했다. 이는 법이란, 권력을 가진 집단이 자기이익을 위해 제정하는 것이니, 당연히 그 시대의 사회적 정의란 권력자들의 이익과 별개론 존재할 수 없단 의미다. 뭔가 뒤끝이 개운친 않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사실 선거구 획정안의 위헌 문제는 오롯이 집권당만의 책임이라 보기도 어렵다. 이는 당시 국회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정당과 그 소속 의원들의 심각한 법률상 해태(懈怠)이자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작위(作爲)의 범죄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일로 인해 처벌받지 않았다.

어떤가? 정말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지 않은가?

지금의 선거제도에도 여전히 문제 많아

그렇다면 지금의 선거제도엔 문제가 없을까? 단연코 그렇지 않다. 2016년 3월 선거구 획정안의 개정으로 인해 일단 급한 불만 껐을 뿐, 아직까지 우리 선거제도는 헌법적 가치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선거구 획정안이 위헌이 된 이유부터 설명하도록 하겠다.

우리 헌법은 선거의 대원칙에 있어 ‘평등선거’를 천명하고 있다. 여기서 평등선거란 모든 유권자의 표가 동일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성별과 직업, 재산과 교육정도, 그리고 종교와 문화 등에 관계없이 개별 유권자가 투표한 한 표는 한 표로서의 가치만을 가진다는 뜻이다.

이런 측면에서 지분이 많은 사람이 지분만큼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주식회사의 주주총회와 국가운영에 있어서의 투표는 확연히 구별된다. 하지만 지역구마다 유권자 수가 같을 수 없는 이유로, 사실상 현실에서는 산술적으로 완벽한 의미의 평등선거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19대 총선에서 경북 영천시의 유권자 수는 10만 3천 명이었고, 서울 강남갑 지역구의 유권자 수는 30만 6천 명이었다. 이 두 지역에서 각각 한 명의 국회의원이 당선됐으므로, 영천시 유권자가 행사한 1표는 강남갑 지역구 유권자가 행사한 3표와 동일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렇게 각 지역구 유권자 수의 편차가 커지면, 사실상 ‘표의 등가성(等價性)’이 훼손되고, 그 결과 평등선거는 불가능하게 된다. 헌법의 대원칙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현실적 불가피성을 보완하고자 탄생한 제도가 바로 비례대표제다.

==> 비례대표제도에 대해선 다음 글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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