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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이 필요하다!(2)
기본소득이 필요하다!(2)
  • 윤양원 기자
  • 승인 2017.11.28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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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실업,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기본소득이 필요하다!(2)

 

신자유주의와 실업,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70년대 들어 케인즈식 수정자본주의 이론의 실패를 주장하며 등장한 신자유주의가 시장을 지배한 이후, 자본집중으로 인한 빈곤과 실업,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자본은 기술을 추동(推動)하고 이에 자극받은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유익(?)한 장치들을 연일 시장에 쏟아내고 있다. 합리적 경제인(經濟人)인 소비자는 이 상품들을 구매하고, 그 구매대금은 시장의 메커니즘을 통해 다시 기업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기업은 축적된 이윤을 통해 다시 소비자를 유혹할 새로운 상품을 개발·생산하고 판매한다.

 알파고로 잘 알려진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은 무인폭격기(일명 드론)를 시작으로 자율주행자동차까지를 인간의 조작 없이 사용 가능케 했고,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은 우리 삶에 필수적인 다수의 편의장치들을 오로지 인터넷을 통한 데이터의 교환만으로 가동·운용할 수 있게 했다. 실로 기술은 지금 무서운 속도로 우리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쪽으로만 작동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극한의 기술문명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 주변엔 여전히 실업과 빈곤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말이다.

 기술적 진보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선 그들에게 적절한 생산수단(직업)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 기술적 진보란 그들에게서 생산수단을 조금씩 빼앗아가는 과정이니, 이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상황을 벗어나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무튼 이런 일련의 과정을 무한반복하며 자본이 집중되는 현상을 자연스런 시장의 기능으로 보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 역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맡겨야 해결이 가능하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자’들이다.

 

무한경쟁이 최상의 효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슈스케(슈퍼스타 K) 방식의 무한경쟁시스템 속에서 먹이사슬의 최상층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최종 경쟁에서 승리한 한 명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경쟁자들이 투입한 노력과 희생은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결국엔 버려진다. 신자유주의식 경쟁시스템의 극단적 자원낭비와 비효율성이다.

 그래서 이 무한경쟁시스템을 노동시장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사람들의 절대다수 역시 결국엔 이 시스템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무한경쟁의 노동시장으로부터 밀려나 생산수단을 잃게 되었을 때, 그 때도 ‘보이지 않는 손’에 모든 걸 맡기자 주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실업의 공포로부터 인간의 존엄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판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의 획일화된 가치에 다양성을 부여해, 모든 사회적 자원이 이 자기파괴적 경쟁시스템에 몰입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선제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미국에도 기본소득은 있다

 다국적 자본과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미국에서도 기본소득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주(州)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동산 신화의 주인공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미국에서 기본소득을 채택한 주가 있단 사실 자체가 좀 낯설기까지 하다.

 하지만 미국의 알래스카 주는 1976년 석유채굴로 인한 수입의 일부를 거주하는 모든 주민에게 일률적으로 배당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했고, 1982년부터 지금까지 주에 1년 이상 거주한 모든 주민에게 매년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제도의 시행 초, 년 300불에 그쳤던 기본소득의 규모는 2008년에 이르러서는 3,000불을 넘어서게 된다. 사실 이 제도가 시행되기까지 연방헌법과의 충돌 문제와 다른 주들의 딴지걸기 등, 여러 난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연으로부터 채취한 자원은 사회적 공통자본이란 생각에 동의하는 유권자의 수가 많았고, 당시 알래스카 주의 주지사였던 공화당 출신의 ‘제이 하몬드’의 의지까지 이에 더해져 이 제도는 빛을 보게 되었다.

 기본소득 제도의 시행 이후 알래스카 주의 소득분포엔 획기적 변화가 일어났다. 2002년 이전 10년간 미국의 상위 20% 가구 소득이 26% 증가한 반면, 하위 20% 소득은 12%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알래스카 주의 경우는 달랐다. 상위 20% 가구의 소득이 7% 증가한 반면, 하위 20% 소득이 28%나 증가했으니 말이다.

 이로써 알래스카 주는 미국에서 가장 평등한 주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기본소득 기능의 긍정적 측면이다.

  

사회에 만연한 공포로 부터 탈피하자

 언제부터인가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서 ‘헬조선’이란 단어가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 각박한 현실에 대한 자조라 생각하고 흘려 넘기기엔 그 단어의 함의가 그리 가볍지 않다.

 ‘헬(HELL)’은 지옥이란 의미다. 한마디로 삶이 지옥 같단 뜻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참혹한 건, 이 단어엔 ‘영원히 탈출할 수 없다’는 포기와 절망의 의미도 같이 들어있단 사실이다. 한마디로 미래가 없단 뜻이다.

 미래가 없는 사회, 내일이 없는 사회는 공포가 만연한 사회다. 그런 사회는 불신의 사회고, 절망의 사회임과 동시에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다. 그래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이 미래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최소한의 예측가능성을 제공하고, 그 속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믿는다.

 현실의 삶에 있어 ‘만약’이란 단어만큼 쓸모없는 것도 없지만, 만약 ‘송파 세 모녀’에게 기본소득이 있었다면, 그래도 그들은 허망하게 삶을 포기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뉴스에 등장하는 살인과 강도, 그리고 절도사건의 상당수는 절대적 빈곤에서 비롯된 우발적 충동범죄다. 최소한 기본소득은 빈곤에서 비롯된 우발적 폭력과 범죄로부터 우리 사회를 보호하는 안전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기본소득이 우리 사회를 좀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로 다시 거듭나게 해 줄 수 있지는 않을까?

 만약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내 집 울타리를 높이고, 보안장치를 설치하고, 그리고 강력한 경찰력을 유지하는 데 소요될 비용으로 기본소득의 재원을 만들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안전한 사회에 살면서 높은 담을 쌓는 건,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어리석은 짓이 될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의 재원은 무엇으로 마련하고, 또 어떻게 지급할 것인가?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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