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동록선생, 중국학자 심평향과 만나다
동록선생, 중국학자 심평향과 만나다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7.04.18 11: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록(東麓) 선생 중국인 심평향(沈萍香)과 조우(遭遇)하다>

거제학자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은 지역사회에서 정군자(鄭君子)라 호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고, 그에 대한 많은 설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또한 추사 김정희와는 동시대인(同時代人)으로서 김정희가 동록문집을 읽고 감탄하여 7언절구 시 한편을 남긴 찬사의 글이 전해지고 있고, 중국인 심평향(沈萍香)도 동록의 시와 글씨를 보고 ‘피와 생활이 모두 군자라고 하였다(血食君子)’고 전한다. 이에 중국인 심평향은 누구이며 어떻게 만 리 먼 지역에서 서로를 알 수 있었을까? 궁금증이 있었던 바, 동록 선생의 문집 시편 중에, 심평향(沈萍香)과 동록 선생의 시(詩) 내용에서 그 갈증을 조금 해소할 수 있었다.

 
19세기 초기 어느 해 8월(음), 중국 상선에 탄 중국 통신사 사신이자 학자인 심평향(沈萍香)과 처음 조우(遭遇)하였다. 당시 중국의 황명(皇命)으로 통상을 하던 중국 상선이 큰 바다에서 풍파에 길을 잃고 거제도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은 천자의 통상 문서를 보여주며 거제도에 약 보름간 체류하게 된 것이다. 중국 상선이 도착하자 거제고을 수령은 급히 말을 타고 달려가 밥을 주고 옷을 입혀 먼 곳의 사람을 구휼해 보살피니 섬나라 예의에 감동하며 서로가 동하였다. 그리고 상선의 심평향(沈萍香)과 상인들이 도촌(道村, 도론동)에 기거하여 여정을 풀도록 배려하였다.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이 통역을 위해 다가가게 되었고 심평향과는 서로의 글을 써서 그 상황과 의사를 전달하게 된 것이다. 이후부터 서로 시문을 주고받으며 서양의 여러 문물과 상품을 선물로 받았고 이들이 필요한 식량 등의 기초생필품을 제공하게 되었다. 동록 선생은 서양의 여러 지식들과 중국의 형편을 심평향으로부터 전해 듣게 된 것이다.

 
한편 심평향의 중국 상선은 그 옛날 서불이 교역하려고 거제도를 방문한 것처럼 돛대를 달았으며 자신을 오나라 합려의 고향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상선은 백 척의 누대와 같이 높았으며 줄을 잡고 사다리를 통해 올라가야 했고 수천의 신기한 보물들이 있었다고 그 소회를 적었다. 심평향은 옥관자를 단 선명한 모자를 썻고 왕이 내린 직물과 옥비녀, 벼슬과 녹봉을 가진 노인이었다고 전하며, 시문이 당시 이태백과 견줄 만하다고 적고 있다. 사천성(四川省) 형경현(滎經縣) 사자로써, 소주(蘇州) 창먼(閶門)의 나그네이지, 양주(楊州)의 학의 등을 탄 신선 같다 한다. 심평향은 당시 사천성(쓰찬성)에서 양쯔강을 따라 내려와, 18세기 최고의 번영을 누린 대도시 소주(蘇州)에서 바닷길을 통해 외국과 교역하려다가, 거제도까지 온 상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록 선생은 이후 떠나는 심평향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조개와 고래 사는 바닷길로 천만리 건너왔으니 원컨대 별 탈 없이 소주(蘇州)에 이르시게(蛤海鯨道千萬里 願君無愁到蘇州)’라고 화답하며 아쉬운 이별을 고하였다. 동록 선생은 이러한 여러 사건 속에서, 거제부사 및 지역 유림들이 인정한 19세기 전기 거제도 최고의 유학자로서, 최고로 존경 받는 스승이자, 또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1) 심평향 시[沈萍香詩]
天朝遺使涉重洋 천자의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큰 바다를 건너다가
破浪衝風驚遠檣 모진 풍파를 헤치니 돛대가 멀어져 놀라웠다
四願忽迷南北路 삼신불(三身佛) 네 가지 소원 빌며 남북의 길을 잃었는데
一枝聊托水雲鄕 한개 나뭇가지 되어 물과 구름의 시골에 의탁하게 되었다
蒼茫烟火山頭起 창망한 연화(烟火)가 산꼭대기에서 일어나고
隱若漁舟浦口蔵 아늑한 어선은 포구에 정박하였다
三代猶存衣尙白 삼대의 가족이 흰 옷을 입고 서로를 살피니
先民有作遇他邦 선인들이 해오던 일을 타국에서 보게 되었다

守吏聞風報上坮 지키던 관리가 돈대에서 풍문을 듣고 보고하니
將軍榮馬問從來 장군이 말을 타고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구나
通商巨舶中華命 통상을 하는 큰 배로 중국의 명(命)으로 왔다며
護使封文異國開 다른 나라는 사신을 보호하라는 봉한 문서를 보여주었다
綽約鳥紗敦古處 아름다운 검은 관모를 쓰고 예스럽고 온화했는데
翩翻翠羽仰半裁 펄럭이는 물총새 깃털에 반쯤 우러러 보였다
幾經險阻情堪訢 험한 일을 몇 번이나 겪었다가 반가운 정을 드러내니
感沐先甞酒一盃 먼저 물로 씻고 술 한 잔을 들이키며 음미했다

芝盖雲旋曙色姸 하늘에 구름이 굽이치는 새벽녘의 빛깔 곱더니
上官簇擁坐當筵 상관을 둘러싸 보호하며 앉아서 연회를 베푼다
情愈相識投棰厚 두터운 정(情)으로 서로를 알아가니 잘 맞아 돈후해지고
語不同音倩筆傳 빠른 붓글씨로 마음 전하니 말이 필요 없었다
差喜殷勤憑慰籍 위로하는 문서로 은근히 견주니 즐거우나
却慙旅况待周全 도리어 나그네 된 상황이 부끄러워 온전히 의지했다
風流太守天涯得 고을 태수의 풍류는 먼 하늘가에서 적합한데
絶似當年李謫仙 그 당시의 이적선(이태백)과 매우 비슷했다

恤遠猶存推解風 밥을 주고 옷을 입혀 먼 곳의 사람을 구휼해 보살피니
海邦禮數感相同 섬나라 예의에 감동하며 서로 동하였다
水無弗與求偏切 물이 부족해도 서로가 함께 간절히 살아가며
飯不相恩命固窮 곤궁함을 잘 이겨내니 먹거리에 서로의 온정이 없으랴
再却微儀何太遜 재차 자질구레한 격식을 사양하니 얼마나 겸손한지
疊邀別饋更從豊 거듭 특별한 음식을 보내오는데 참으로 넉넉하다
聊吟短句留佳語 부족하나마 좋은 말을 남기려고 짧은 글귀를 읊는다
巨濟應添記略中 응당 거제도 체류 시의 사실을 간략히 기록하여 덧붙인다
도촌의 시냇가 집에서 한가하게 거문고를 평하며 토로했다. 성산 심평향(道村溪屋 冩于評琹暇 星山)


2) 소주 상선 심평향에게 바치는 시에 차하다[次蘇州商舶 沈萍香 呈本官詩] / 정혼성(鄭渾性 1779~1843)
滔滔江漢注東洋 넘실거리는 장강(長江)과 한수(漢水)의 물은 동쪽바다로 향하고
萬里浮來吳楚檣 만 리 먼 오나라 초나라 돛대를 달고 떠다니며 왔다네
此去貿遷徐市國 서불이 교역하려고 떠나갔다가 나라를 세웠다는데
自言居住闔廬鄕 스스로 오나라 합려의 고향 사람이라고 말한다
初筵酌酒弓虛照 처음 연회에서 술을 마시다가 쓸데없이 활에 마음이 쓰여
後夜移舟壑暗蔵 새벽녘에 배를 움직여 어두운 골짜기에 감추었다네
猶有風濤餘悸否 오히려 바람과 큰 물결 일어 두려움에 떨었다는데
古今平地即吾邦 예나 지금이나 평지는 우리나라 땅이었다

危舟百尺似樓坮 위태로운 배는 백 척의 누대와 같아
攀索緣梯許上來 줄을 잡고 사다리를 통해 위로 올라가야 가능했다
居貨累千珍蔵秘 재물 중에 수천의 신기한 보배를 감추어두었는데
容人數十曲房開 수십 명의 사람들이 밀실에 늘려있구나
饒金上客華氊倚 넉넉한 금과 귀빈이 화려한 담요에 의지하였고
頂玉高官蒨帽裁 옥관자를 한 고관은 선명한 모자를 썼다
載得江南風味好 강남에서 실은 고상한 음식 맛이 좋은데
軟灰浸酒綠盈盃 연회색 빛 담근 술이 잔에 가득하네
왕이 내린 직물과 옥비녀, 벼슬과 녹봉을 가진 노인이었다(有王織雲者簮玉爵祿同知)

聖母粧嚴金像姸 성인의 어머니(聖母) 장엄하고 금빛 형상 고운데
旃香膩燭錦張筵 아름다운 연회에는 향기로운 깃발과 기름때 묻은 촛불 밝히네
藉天朝命徒文示 천자(天子) 조정의 명령을 받았다고 글월을 보여주며
幫日新功實契傳 날마다 새로운 공적을 도우니 실로 계합이 되었다 전한다
歸帆一聽風送去 한번 살펴 왔던 돛단배가 바람 따라 갔다가
殊方三見月虧全 이역 객을 세 번 만나니 달도 온통 이지러졌네
銅山使者閶門客 사천성(四川省) 형경현(滎經縣) 사자는 소주(蘇州) 창먼(閶門)의 나그네
便是楊州鶴背仙 이는 곧 양주(楊州)의 학의 등을 탄 신선일세
재물의 주인인 김일신(金日新)의 명인을 찍은 계약서가 있었다(以財主金日新名印契券)

鮮纜長洲舶趕風 바람을 쫓아온 선박이 긴 물가에 닻줄을 드리우고
旋隨海雁作賓同 바다 기러기를 따라 돌다가 객과 함께 나왔네
一天涯角誠非偶 한 하늘 아래 먼 땅으로 온 것은 실로 우연이 아니었으나
八月河源謾欲窮 팔월 달 하천은 부질없이 궁벽하였다
率土皆知名哭重 온 나라 안에 곡소리가 거듭 울림을 모두 다 알았으나
行裝惟見貨財豊 행장(行裝)엔 오직 재화만 풍성했다네
平生不會工詩律 평생 동안 시(詩) 음률(音律)의 기교를 몰랐는데
白雪無因和郢中 백발이 되도록 원인을 몰랐던 영중의 노래(郢中)로 화답한다
[주] 영중의 노래(郢中) : 비속한 유행가. 영중가(郢中歌). 영(郢)은 초(楚)의 수도임. 전하여 속인들의 환심을 말한 것임. 영중무인(郢中無人)은 품격이 높을수록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 동록(東麓) 선생은 그의 인생여정에서 벼슬살이를 할 기회가 한번 있었다. 그의 학문이 서울까지 알려진 어느 해 가을철에 거제관리가 사슴고기와 함께 승정원(承政院)에서 보내온 의관을 주며 천 리 먼 서울에서 등용을 결정했으니 상경하라고 알려왔다. 그러나 선생은 부모가 이미 병이 들어 나 홀로 서울로 갈 수 없다고 반려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결정을 하기 전에 마을 언덕에서 교지를 여러 번 읽으며 친족들의 형편과 노쇠한 부모의 얼굴이 겹쳐 망설이다가 결국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다. 이후 선생은 잔잔히 흐르는 계곡물과 저 멀리 아득한 계룡산과 선자산, 달과 별, 이렇듯 고요한 정취가 깃든 깊은 계곡에서, 그윽한 향내를 풍기는 만물의 소생과 쇠퇴를 지켜보며 자연과 벗이 되어 한 평생을 보냈다.


● 아래 글 ‘서양금(西洋琴)’에 따르면, ‘서양금(西洋琴 양금)은 이마두(利瑪竇) 즉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에 전래한 현악기이고, 구라철사금(歐羅鐵絲琴)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양금은 14줄의 철사 줄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의 시편에서 건륭(乾隆) 계축년(癸丑年 정조17, 1793년) 7월 10일(七月十日), 서양금(洋琴)에 황홀(怳惚)했으나 처음에는 잘 알지 못해 연주할 수는 없었다(無能解若)고 적고 있으나 불과 사시(巳時)에서 미시(未時), 약 3시간 만에 능히 이해해 곡조를 조절할 수가 있었다(自巳至未不過三時能解得腔調)고 기록해 놓았다. 1793년에 이미 서양금이 거제도에서 사용하고 있었고, 동록선생은 그의 나이 15세에 거제에서 서양금을 처음 접하고 이를 연주한 것으로 판단된다.

3) 서양금[西洋琴] 구라철사금(毆羅鐵鉉琴) / 정혼성(鄭渾性 1779~1843). 건륭(乾隆) 계축년(癸丑年 정조17, 1793년), 서양금(洋琴)에 황홀(怳惚)했으나 잘 알지 못해 연주할 수는 없었다(無能解若). 불과 사시(巳時)에서 미시(未時), 3시간 만에 능히 이해해 곡조를 조절할 수가 있었다(自巳至未不過三時能解得腔調).
絃將鐵線四相加 음높이가 같은 네 줄의 쇠줄로 이어져 만든 현악기로
西泰遺琴制度華 서태 이마두(利瑪竇)가 제도하여 전해진 거문고이다
短撥横敲金作柱 금으로 만든 기러기 줄로 가로로 두드리며 짧게 타는데
梧桐破斲玉雕花 오동나무를 쪼개 깎아 아름다운 꽃을 새겼다
八蠻奇伎耶蘇國 남방 여덟 오랑캐가 중국에서 기특한 재간으로 연주하니
三譯傳解瑪竇槎 이마두(利瑪竇)가 만들어 통역하여 설명해서 전해주었다
不費時辰能見觧 능히 이해할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도 널리 사용하진 않았으나
至今腔調襲洪家 지금은 홍씨 집(홍대용)에서 물려받아 가락을 조절했다

 

[주1] 이마두(利瑪竇) :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의 중국 이름. 중국에 최초로 천주교를 전파한 선교사.
[주2] 서양금(西洋琴) : 양금은 유럽에서 전래된 현악기라 하여 서양금(西洋琴), 구라철사금(歐羅鐵絲琴)으로도 불린다. 양금은 우리나라의 다른 현악기와 달리 명주실이 아닌 철사줄로 되어 있으며 농현도 불가능하다. 음높이가 같은 네 가닥짜리 구리철사 14벌이 두 괘에 의하여 울림통 위에 좌, 우 중앙으로 나누어져 있고, 가느다란 대나무 채로 쳐서 소리를 낸다. 조선 시대 영조 때부터 사용된 이 악기는 영산회상과 가곡 반주 또는 단소 또는 생황과의 병주에 많이 쓰이며 금속성의 맑은 소리를 낸다. 홍대용이 이 악기를 처음 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 애체[靉靆] 속명 ‘안경’(俗名眼鏡) / 정혼성(鄭渾性 1779~1843)
磨將空色淨繊雲 맑은 하늘색으로 갈아 만드니 잔 구름처럼 깨끗한데
照徹毫芒了十分 밝게 비추어 주어 작은 것에도 충분히 눈이 밝아진다
能使玄花明似炬 능히 눈동자를 횃불처럼 밝게 만드니
蝿頭字看斗來文 받은 편지의 파리 머리만한 글자를 볼 수 있었네
위 글에서 동록 선생이 말하길, ‘맑은 하늘이 깨끗하게 보이고 작은 것에도 눈이 밝아진다. 눈동자를 횃불처럼 밝게 만들며 편지의 파리만한 글자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19세기 전반 거제도에는 안경(돋보기)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