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시 거제면 죽림포(대숲개) 마을은 거제도에서 옛 역사와 전통 풍속이 가장 많이 남아 전하는 유서 깊은 어촌이다. 넓은 해안에는 굴 가리비 종묘장과 죽림해수욕장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남해안별신굿, 수중묘, 할매미륵석불 등을 보유하고 있다.
水處長州擧網初 긴 섬의 물가에 그물을 처음 쳐놓으려고
庸庸蜃雨暮天疎 저문 하늘에 성긴 여우비 속에서 애를 쓰는구나.
笛中和曲能荒世 공허한 인간세상 피리소리에 가락을 맞춰보는데
却使詩肩(浞+耳)起余 갑자기 어깨에 의지한 나의 귀를 흡족하게 하네.
2) 죽림루[竹林樓](1) / 이학규(李學逵 1770∼1835)
江日亭亭隱一灣 강 위의 해는 우뚝 솟아 만(灣)속에 감추니
遊人猶自凭空欄 구경꾼은 스스로 빈 난간에 기대어 보는구나
百秊可使樓中住 한평생 일을 부리다 다락에서 머무는데
未必人間做好官 높은 벼슬에 올랐다하여 반드시 됨됨이가 좋지는 않다네.
● 이학규(李學逵) 선생의 낙하생집에 나오는 거제관련 한시들은 경남 김해 유배시절인 1810년과 1821년 거제도 지인인 유한옥의 집을 방문하여 남긴 작품들이다. 당시 거제부(巨濟府)는 김해진관(金海鎭管) 소속이었던 까닭에 김해유배객은 김해진관 소속의 지역에, 유배객을 일시 위탁관리 하기도 했다. [이배(移配)와는 그 의미가 달랐고 거제면에서 약 4년간 거주하였다]. 거제면 외간초등학교 입구 장군돌은 그의 거제유배 자취로 남아 전한다. 이에 이학규 선생은 고성통영은 물론, 거제시 거제면으로 자주 내왕할 수가 있었다. 또한 유달리 풍류와 시를 좋아했던 이학규선생이었고, 거제 유한옥(兪漢玉) 선비와는 마음이 통하는 지음(知音)사이였다. 또한 이학규 선생이 창작한 많은 시편 중에 바다의 물산 즉, 어패류 관련 작품은 거제도와 김해에서 체험한 작품이 함께 섞여 <낙하생집>에 실려 있어, 당시 19세기 초의 경남 해안지방의 물산(物産)과 풍속을 알 수 있는 소중한 문집이다. 선생이 남긴 거제 시편 중에는 '거제 기녀(기생)' '죽림포' '죽림루' '기성표고버섯찬가' '은적암(隱寂庵)' '정수사(淨水寺)' 등 수십 편의 작품이 있다. 거제도의 모든 형승을 아름답게 읊어준 선생께 삼가 존경의 념(念)을 바친다.
3) 죽림루[竹林樓](2) / 이학규(李學逵 1770∼1835)
一曲朱欄枕碧流 한 굽이 붉은 난간 푸른 물을 베고 있어
行人指點竹林樓 행인이 가리키며 죽림포라네
管絃聲裏沉紅日 관현악 소리에 석양의 붉은 해 가라앉고
楊柳枝歬隱綠洲 버들개지 가지 앞에 푸른 물가 숨는구나
百尺元龍眞幷世 큰 다락에서 참으로 인간세상을 아우르고
万錢騎鶴屬同游 만전(万錢)에 학을 타고 함께 무리지어 노닌다네
佗時擬見岐城好 다른 때 언제 보아도 거제(기성)는 아름다워
名(西*水)千鐘畵鷁浮 소문엔 서쪽 물가에 천개의 종이 있어 익조(물새)화상이 떠다닌다네
不風流自缺風流 바람이 없어 자연히 흘러 풍류에 젖으니
始說名樓便詠樓 비로소 말하길 이름난 누각이 편영루라네
朙月幾回留畵壁 밝은 달이 몇 번이나 화벽(畵壁)에 머물고
綠蕪何處近長洲 푸른 풀섶 어느 곳이 가까운 장주(長洲)인가?
百秊未滿嗟吾老 한평생 만족하지 못해 늙어서 탄식하는데
一世相知羡爾游 그 때 서로 아는 사이라 너의 헤엄치는 모습을 부러워하겠지
十曲欄干千尺舫 열굽이 난간에 천 자(길이)의 배
常時魂夢此中浮 상시 꿈속의 넋은 이 가운데 떠다니네
[주] 백척원룡(百尺元龍) : 원룡은 동한 진 등의 자. 호기가 있는 사람. 허범이라는 사람이 찾아가니 그는 큰 침상에 올라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백척원룡은 큰 다락을 일컬음.
4) 죽림마을 문화재와 설화
● 먼저 중요무형문화재인 <남해안별신굿>은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대동굿의 일종으로, 동제가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것인 데 비해 다신을 모시는 제축적 성격이 강하다. 남해안별신굿은 경남 거제시를 중심으로 거제시 도서지방, 한산도, 욕지도, 사량도, 통영, 삼천포, 남해등지에서 이루어지는 이 지역 어촌마을의 공동제의이다. 이 별신굿은 제의를 중심으로 하는 축제적 기능, 통합적 기능, 정치적 기능, 종합예술적 기능 등 우리 고유의 신앙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별신굿은 예전 거제지역에서는 흔한 굿판이었으나 거제지역의 별신굿은 조선산업의 발달과 도시화의 영향으로 1992년 공연을 끝으로 중단되어 오랜 세월 이어온 거제의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몰렸으나 지난 2008년 정영만회장이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 있던 죽림별신굿을 2년마다 공연하기로 하면서 다시 살아났다.
예전엔 거제도의 양화, 망치, 구조라, 수산, 도장포, 저구, 다대등 별신굿을 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띠배놀이와 탈굿(탈놀음)은 유일하게 죽림마을에만 있는 전통이다. 따라서 죽림의 별신굿은 반드시 유지시켜야 하는 것이다. 띠뱃놀이는 억새풀로 배모양을 만드는 것인데 지금은 볏집으로 한다. 배모양으로 두 채를 만들어 각 배에 동네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후 그곳에 동네의 액운과 소원을 담아 말리 보내는 것으로 복을 두고 액운을 가져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 마지막으로 죽림마을 여치끝에 ‘수중묘‘가 있다. 거제면사무소 자료에 따르면, 배귀임(1863~1948) 할머니는 생전에 남편과 금슬이 좋아 슬하에 6남 4녀를 두었다. 그러나 자식들이 부부간의 금슬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없는 것을 할머니는 안타까워했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낮잠에서 깨어난 후 "조상인 듯한 분이 죽게 되면 마을 끝 바닷가인 '여치 끝'에 묘를 쓰라고 말씀하셨다"면서 "자신이 죽거든 꼭 그 곳에 묻어달라"고 자식들에게 당부했다. 그 말을 한지 한두 달 뒤 거짓말처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급작스런 할머니의 죽음에 놀란 자식들이 장례를 의논하게 됐다. 자식들이 "여치 끝에 묻어 달라"던 할머니의 말을 생각하고 어머니의 생전 당부대로 여치 끝에 묘를 쓰자는 자식들과 파도에 유실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자식들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자식들은 어머니의 유언을 받드는 뜻에서 여치 끝에 묘를 쓰고 장례를 치렀다. 그러자 손자들이 잇달아 태어났고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대를 이어 죽림마을에 살고 있다고 한다. 조상이 꿈에 나타나 해안 끝에 묘를 쓰고 나자 자식이 없던 아들이 자식을 얻었다는 소문이 나자 죽림마을은 물론 자손이 귀한 집안과 금슬이 좋지 않은 아낙들이 할머니의 묘를 찾아 정성을 다해 기도한 후 자식을 얻고 금슬이 좋아졌다는 이야기가 최근까지 구전돼 오고 있다. 지금도 70여 년이란 세월과 세파 속에서도 할머니의 유골은 잘 보존돼 있어 후손들이 해마다 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