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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면-삼봉산 굴째봉 뚝방 기지촌
연초면-삼봉산 굴째봉 뚝방 기지촌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7.02.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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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근의 거제섬 이야기] 뚝방 기지촌이 있었다

물 첩첩 지나
산 첩첩 들어와
거제도하고 연초 삼봉산 비알에
구들 놓고
네 식구로 울바자 치고
이러구러 십 년
삼순구식이더라도
빌어먹진 않았잖소.

마당에 차린 늦은 저녁상엔
국 대접 고명으로 찰랑거리는 반달
아이들 웃음소리 콩자반 위로 다글거리고
용접 불꽃에 익은 눈이
쓰린 고단을 뚝뚝 흘리는데

ㅡ아부지는 와 맨날 눈이 벌겋노?
ㅡ씰데 없는걸 봐서 그렇니라.
ㅡ안 보믄 되제.
ㅡ욕심이 나서 자꾸 보게 되는구나.
ㅡ못 낫는거야?
ㅡ저 하얀 반달을 보니 좀 낫네.

아들은
대야에 찰랑찰랑
하얀 반달을 담아
아비의 눈을 씻기고

<저녁 반달에>

 

▲ 연초 삼봉산

낯설고 물 설은 거제도에 들어와 작은 시골 마을에 단칸방을 얻어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하여 십여 년을 살았었다.

연초면은 외지인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해안선이 짧아 딱히 빼어난 경관을 가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섬 속의 농촌이라 뭍에서 온 사람들의 눈을 끌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어디 이곳이라고 마을마다 주저리주저리 열린 전설과 아린 이야기가 없으랴.

섬치고는 제법 큰 하천인 연초천 뚝방길을 따라 걸어가며 사람 사는 얘기나 들어볼까. 고현만 북쪽 앵산 아래 한내 마을 앞에는 특이한 바람막이숲이 있다. 모감주나무숲이다. 겨울이라 잎은 지고 없지만 흰 가지가 여러 갈래로 잘게 뻗어 바다 속 산호를 옮겨 심은 듯 멋스럽다. 여름 황금색 꽃이 만발하면 그 모습 또한 장관인데 7월경 알려지지 않은 모감주나무 숲에서 황금 꽃비를 맞는 나들이 계획을 잡아 보시라.

전설에는 강원도 금강산에 사는 스님이 한내 마을 뒤 앵산 북사라는 절에 들렀다가 풍수상 이 마을의 허한 곳을 보하고 바다로부터 피해를 막기 위해 심었다 한다. 실제로 모감주나무의 열매는 최상품의 염주로 쓰이기 때문에 염주나무로 불린다. 그러니 부처님의 가피로 재난을 막고 풍어를 바라기에 맞춤인 숲이다. 예전에는 해안을 따라 길게 조성되어 있었으나 바다가 매립되어 공단이 들어서면서 많이 훼손되어 40여 그루만 남아있다. 풍어제를 지내고 그물 손질을 하며 더위를 식히던 숲은 경남 지정기념물로 등록되면서 철책으로 막아 보호(?)되고 있다. 원래 숲이 조성된 기능을 이용하지 못하고 숲과 더불어 다듬어지고 전해 내려온 문화유산들마저 기억 속에 가두어 버린듯하여 씁쓸하다.


 
▲ 모감주 나무


 
▲ 모감주 열매

소오비 마을을 지나 연초천을 따라 오르면 국도 14호선이 내를 건너간다. 다리 오른쪽 고현, 수월 지역은 포로 수용소였기에 미군 헌병들이 지키고 검문하던 곳이라 연초교라 불리는 이 다리를 어르신들은 아직도 'M.P다리'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당시 거제에는 원주민이 10만, 피난민이 15만, 포로가 17만 해서 모두 40만이 넘게 살았다. 60년이 지난 지금 25만 명도 미어터지고 있는데 그 때 40만은 어떻게 살았을까? 철조망 안에서 감시를 받는 형편이지만 국제 협약으로 보호받는 포로의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겠지만 피난민은 그렇지 못했다. 흥남 철수로 한꺼번에 장승포항으로 쏟아져 들어온 피난민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유엔군의 물자가 흘러나오는 포로수용소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M.P다리 주변 연초천 민간인 지역의 뚝방에 미군들이 버린 깡통을 펴서 이어 붙여 지붕을 올리고 나무판자를 주워 벽을 세운 허술한 판자집을 지어 살면서 이른바 뚝방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포로수용소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용 물자를 밀매하거나 포로들과의 물물교환으로 시장을 형성하였다. 양키시장이라 불렀던 이 시장에서 나온 양담배, 커피, 양주, 통조림, 군복 등이 부산 국제시장에까지 공급되었다 하니 규모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 연초면 소재지와 연사들판. 연초천이 가로지르는 위쪽이 포로수용소. 아래쪽이 기지촌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으로 이 땅의 젊은이들만 총알받이로 내몰린 것이 아니었다. 점령군의 주둔지에 꼭 피어나는 상처 입은 장미들이다. 집창촌 역시 이 뚝방 판자촌에 자리 잡았다. 그들의 전쟁으로 피폐한 나라에서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생계를 잇기 위해 내몰린 그녀들은 그들에게 몸을 팔았다. 이 이야기에 누군가는 굳이 자발적 매춘 행위라고 토를 달진 모르겠지만 내 귀에는 에니멀즈의 '해 뜨는 집'을 번안한 노래가 그녀들의 목소리를 타고 들린다.

 

상처 입은 장미들이 모여 사는 거리
눈물에 젖은 장미들이 웃음을 파는 거리
사람들의 비웃음도 자장가 삼아
흩어진 머리 다듬고서 내일을 꿈꾼다오.
그 언젠가 찾아가리. 해 돋는 집으로.
꽃피는 마을, 내 고향에 어머님 곁으로.....

 

양키시장과 극장, 집창촌과 무도장, 술집, 목욕탕 등이 번성하던 이 기지촌은 포로수용소장 돗드 준장의 납치 사건 이후 뚝방 근처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철거되었다.

임전 마을 앞길을 지나 효촌 마을 가는 길 연초천이 굽이친 곳에 시퍼런 소가 흐르는 냇물을 휘감아 돌리며 소용돌이친다. 독사덤벙이다. 해마다 물놀이 사고로 아이들이 빠지고 세상을 등지려는 사람들이 많이 상하는 곳이라 접근하지 못하도록 독사를 많이 풀어 놓아서라는 말도 있고 원래 독사가 많이 살아서 독사덤벙이라 했다. 가물어 하천 바닥이 드러나도 물이 마르지 않아 들판을 적시고도 남았다 한다.

효촌 마을에는 이 애잔한 뚝방길을 바라보고 선 비석이 있다. 중종 12년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이 장계를 올린다.

"거제(巨濟)의 염한(鹽漢) 이돌대(李乭大)는 일곱 살에 아비를 잃었는데, 지극한 효성으로 어미를 봉양하여....." 이런 류의 장계로 정려문을 하사받아 세운 곳은 조선 팔도 골골 어디나 있는 것이라 그냥 지나치는데 효촌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돌대 전설은 따로 있었다.


 
▲ 효촌 마을 이돌대 효자비

거제 똥바람이 매서운 정이월. 여느 전설처럼 어머니는 숭어가 먹고 싶다고 했단다. 없는 숭어를 잡는다고 여러 날 바닷가를 헤매다 까무룩 졸고 있는데 용왕이 나타났다.

"이 길로 견내량을 건너 통영 용남으로 가거라."

돌대는 한달음에 견내량에서 배를 탔는데 냇물처럼 흐르는 거센 물살을 박차고 바다에서 사람 키만한 숭어가 배 위로 뛰어 오르더란다. 너무나 좋아 기뻐하는데 뱃사공이 자기 배에 뛰어 오른 것이니 내놓으라 하더란다. 어린 소년이 아무리 사정해도 막무가내더래.

그러던 차에 눈을 꿈벅꿈벅하며 다툼을 보던 숭어가 바다로 도로 뛰어 들어가 버리네? 돌대가 기가 막혀 뱃전에 넉장거리를 치는데 방금 그 숭어가 돌대 품속으로 다시 뛰어들더란다. 자기 품속에 뛰어든 그 숭어를 어머니께 드려 병이 나았더라는 이야기를 품은 이돌대는 중종으로부터 장사량 벼슬과 효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얻었단다.

연초천 상류 밀바대들에서 연초면지를 편찬한 이득만(80) 어르신을 만나 남여산 굴째봉 삼장사가 임진년 왜적을 물리친 이야기를 들었다.

"굴째봉? 어르신 혹 굴재봉을 세게 발음하신거 아닙니꺼?"

"아이라. 굴이 째졌다고 굴째봉이라. 굴이 깊어 무시무시한 곳이라. 숨어서 모의하기 좋은 곳이제."


 
▲ 밀바대들과 굴째봉 전설을 들려주는 연초면지를 편찬하신 이득만(80) 어르신

연초천을 다 더틈고 거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사는 마을 주령을 오른다. 주령(珠嶺)은 올망졸망한 산봉우리들이 고개 고개 연이어 첩첩으로 엮인 모습이 구슬 꿴듯 하다고 붙여진 마을이다. 주령 먼당에서 연초 송정이 안태본인 원모 시인에게 전화를 넣었다.

"아요, 원시인 고향 동네서 굴째봉 가는 길 있다는데 혹 아시오?"

"뿔당골 여시고개 먼당에서 북쪽으로 한 5백 미터 올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왜요?"

또 주절주절 설명한다.

"내 바로 갈태니 뿔당골 먼당에서 만납시더."

그러실 필요 없대도 동네 뒷산에서 놀던 추억도 되새길 겸 직접 안내하겠다 하신다. 인근 군 부대가 이전할 계획이라 앞으로 찾지도 못할 곳이라 하니 마다할 수 없어 수고를 부탁드렸다. 아직도 산도(山稻:밭나락)를 심는다는 다랭이논 몇 배미를 지나고 묵정밭둑 몇을 오르자 길이 없다. 오백 미터를 반 시간이 넘게 올랐다. 소 먹이러 다닐때는 맨들맨들한 길이 있었단다.

"이런, 문디.... 30년 전이라며?"


 
▲ 굴째봉

길을 잃고 난감해하는 굴째봉 소먹이 소년에게 궁시렁거리며 남여산 정상에 올랐다. 거제 숨은 비경 중 하나가 이 남여산 산벚나무 숲이다.봄이면 온 산이 구름차일을 두르고 하늘에 둥실 뜬 듯 아름답다. 임진년 5월 7일 이순신 장군은 옥포 해전에서 왜선을 포구쪽으로 밀어붙이고 화포로 궤멸시켜 승리한다.

그러나 많은 왜병들이 배를 버리고 섬으로 도주해서 왜성까지 쌓고 장기전으로 나선다. 굴째봉에 근거지를 둔 신응수, 김희진, 윤영상 삼장사는 덕치리 하청장터에서 분탕을 치는 왜병을 급습하여 크게 이기고 옥포로 도주하는 적을 뒤쫓아 굴째봉 아래 밀바대들에 이른다.

이 때 신응수 장사가 솥뚜껑에 숯불을 담아 팽이처럼 돌려 적을 공격하니 삼대 쓰러지듯 하였더란다. 백성들이 굴째봉에서 숯을 피워 솥뚜껑을 장사에게 보내 이곳에서 전멸시켰단다. 적들의 피가 바다를 이룬 곳이라 해서 피바대, 또는 몰살한 곳이라 해서 몰바대, 밀바대들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어린 시절 컴컴한 굴속에 박쥐가 푸드득 날고 깊이를 알 수 없었던 그 무시무시하고 경외로왔던 대상이 한낱 갈라진 바위틈이었음을 확인한 시인은 하산 길 내내 중얼거렸다.

"괜히 왔어.... 그대로 간직할 걸 괜히 왔어..."

참 미안했던 산행이었다.

가랑비 오는 날이면 애기무덤이 있다는 돌무데기에서는 도깨비불이 펄쩍펄쩍 뛰었다.
이런 밤이면 뒷산 굴째봉 큰 굴에서는 임진년 장군들의 작전모의 소리도 수런수런 들린다 했다.
쾡한 달무리가 작은 국사봉을 휘감을 때마다 봉산재에 산다는 늙은 여시가 캥캥 울었다. ㅡ여시고개 일부(원종태 시집 '풀꽃 경배')

/단디뉴스 2016.02.15
 

박보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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