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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간' 여림 시인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간' 여림 시인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6.09.0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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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장승포항, 김호일 작

아버지는 언제나 저녁을 드시고 오셨다

보리와 고구마가 쌀보다 더 많았던 저녁밥을

밥그릇도 없이 한 양푼 가득 담아 식구들은 정신없이

숟가락질을 하다가도 조금씩 바닥이 보일라치면

큰형부터 차례로 수저를 놓았고 한두 알남은​ 

고구마는 언제나 막내인 내 차지였다 

 

이제 나는 혼자 밥을 먹는다

거제도 장승포 출신 여림(본명 여영진, 1967~2002)의 시 '어린 시절의 밥상 풍경'이다.

70~80년대 가난한, 대부분의 시골집 저녁풍경이다. 바글바글한 아이들이 밥상 한가운 큰 양푼이에 산같이 쌓인 밥을 작은 삽을 들고 퍼먹고 있다. 작은 삽을 연신 입으로 가져간다. 반찬이라고야 푸성귀 뭉치들일 것이다. 멸치라도 고추장에 찍어먹으면 다행이다. 밥을 먹는게 아니라 뱃속에 쌓는다. 언제나 저녁을 드시고 온다는 아버지는 밥을 먹지 않은 날도 많았을 것이다. 형제애는 두터워서 그래도 몇 살 더 먹은 형부터 숟가락을 놓았다. '정신없이' 먹다가 바닥이 보이면 가족으로, 인간으로, 정신이 돌아온다.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풍경. 풍경은 멀리 있어서 아름답다. 이제 혼자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쪽에서 저쪽을 본다. 외롭고 아프다.
함께 밥 먹는다는 것은 함께 살아간다는 것. 원시 이래로 사냥하고 사냥감을 함께 나눠 먹는 식사는 서로 잡아먹지않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다. 사람들이 함께 밥 먹는 이유다. 혼자 밥 먹기 싫은 이유다. 유전자 속에 둥근 식탁이 박혀있다. 밥상 밖에 나를 잡아먹으려는 존재들이 우글우글하다.
여림 시인의 고향집 주춧돌은 장승포 해안도로 어디쯤에 깔려있을 것이다. 시인의 시 '떠난 집'에는 마당의 끝이 바다였고, 소읍에서 관공서 다음으로 3번째로 벽돌로 지은 집이었으며, 87년 도시개발계획으로 도로로 편입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여림 시인은 서른 다섯 나이에 요절했다. 거제해성고를 나와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다니다 중퇴했다. 인생도 중퇴했다.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실업'으로 당선됐으나 이후 한번도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발표하지 못한 것일까. 지독한 가난과 고독속에서 홀로 죽었다. 문우들이 그의 컴퓨터에 있던 시들을 모아 2003년 유고시집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를 펴냈다. 2016년 그의 시와 산문 등을 모두 모아 유고전집으로 낸 것이 <<비 고인 하늘을 밝고 가는 일>>이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이다. 150여편의 시편들은 여리고 가늘고 우울하다. 외롭고 순한 늑대의 울음소리다. 비라면 안개비다. 세상에 대한 따듯한 사랑이 그 만의 방식으로 호흡하고 있다. 요절, 외롭고 높고 쓸쓸한 전통 위에 비의 술 한잔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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