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통영 이중섭미술관을 기대한다
통영 이중섭미술관을 기대한다
  • 원종태 기자
  • 승인 2016.08.09 10: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영사람들은 통영을 토영이라고 부른다
이중섭은 토영 시인 화가들과 새미골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술값으로 그림을 그려주었다
평안도 사내 백석이 스무 해 전 토영 가시내를 찾아 시를 울던 충렬사 돌계단이다
이중섭은 동경으로 보낸 아내를 생각하며 흰소를 그리고 있다
이 사내도 목이 긴 평안도 사람이다
내일이면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남망산을 단숨에 올라 바라보는 현해탄은 은박지처럼 반짝이고
오늘도 바다는 소식이 없고 피난은 간처럼 쓰다
항남동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2층에서 방금 태어난 황소는 허엉허엉 붉은 해처럼 서피랑을 넘는데
오늘은 달도 까마귀도 없는 밤
모래밭은 먼데 청게 몇 마리 아이들처럼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은하수를 끌어다 병장기를 씯는다는 사백년 세병관
가물한 현판 위로 은하수는 또 흐른다
-졸시 이중섭의 통영

통영은 이중섭의 자취가 뚜렷한 곳이다.
비운의 국민화가 이중섭(1916~1956). 그는 공예가 친구 유강렬의 권유로 52년 늦은 봄부터 54년 봄까지 약 2년간 통영에서 생활하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김순철의 《통영과 이중섭》에 따르면 화가는 항남동에 있는 도립통영나전칠지기술원양성소에 기거하면서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 대여 김춘수 등 문인 예술가들과 교유했다. 교유는 예술적 자극을 낳고, 평안도 출신인 화가의 따뜻한 남쪽나라 통영의 기억은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성림다방에서 40여점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전혁림 장윤성 유강렬 등과 함께 3인전, 4인전을 열었다. 화가 이중섭에게 통영은 르네상스였다. 황소 시리즈를 비롯해 달과 까마귀, 부부 등 대표작들이 생산된 곳이다. 구상화가인 그가 통영을 소재로 수많은 풍경작품을 그린 것도 통영 생활이 남긴 특징이라는 평가다. 이중섭의 풍경모티브 작품은 십여점이 있는데 서귀포 2점, 서울과 왜관 각1점, 나머지는 통영이라고 한다. 통영의 장소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통영과 이중섭》은 당시 이중섭과 교유한 분들인 서양화가 전혁림, 나전칠기양성소를 1기로 졸업한 옻칠의 대가 김성수 등의 인터뷰를 통해 이중섭의 통영시대를 성실하게 고증하고 있다. 당시 이중섭이 기거했던 곳에는 표지석이 있고, 항남동에는 그의 작품으로 된 보도 아트타일이 깔려 있다. 이중섭의 통영시대는 가장 심신이 안정됐던 시기이며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던 시기다. 통영 최초의 서양화가 김용주를 비롯해 많은 통영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올해는 마침 이중섭 탄생 100주년이라 서귀포를 비롯해 덕수궁미술관 등에서 기념전시회를 한다. 예향의 도시 통영은 중섭의 르네상스였지만 이를 기념하는 본격적인 움직임이 없다 한다.
제주도가 중섭 가족의 거주지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이중섭미술관을 세우고, 이중섭거리와 공원을 만든 것과 비교된다. 이곳에는 해마다 수십만명이 찾는다한다. 서귀포에는 51년 1월부터 같은해 11월까지 생활했으며, 작품으로는 <섶섬이보이는 풍경> 등 4점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화가의 아내와 아들이 참여하는 이중섭가족전시회를 기획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통영에서 그가 거주하고 데생을 가르치기도 했던 도립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도 손색이 없어보인다. 당국이 매입해 미술관 등으로 활용해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통영에는 아직 이중섭의 진품 그림이 없다 한다. 그의 그림을 원작지에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감동이겠는가.
최근 통영 길문화연대 김용재 선생님의 안내로 이중섭의 통영시절을 걸었다. 골목마다 풍경마다 이중섭의 자취는 60년 세월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남망산 오르는 길과 세병관, 푸른 통영바다 등 작품속에 이중섭은 살아있었다.
이중섭이 작품을 구상하고, 가난으로 인해 일본으로 간 아내 이남덕 여사와 두 아들을 생각하며 걸었을 법한 길과, 통영풍경을 그렸을 장소들이 겹쳤다. 이 길은 또한 숱한 내로라하는 근현대 예술인들이 걷던 길이기도 하다. 60년 전 화가가 걸었던 통영의 길에서 고독하고 가족을 그리워했을 화가와 함께 걷는 듣한 착각도 일으켰다.
항남동에는 중섭공방이, 강구안골목에는 이중섭식당이 있고, 병선마당 거북선 앞에는 표지판이 있다. 그가 어울려 술 마시고 술값대신 그림을 주었다는 새미식당, 전시회를 열었던 성림다방 등등은 모습을 바꾼 채 아직도 남아 있다. 그와 교분을 나눈 분들의 2세대들도 건재해 이중섭의 통영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중섭의 통영 창작품들은 그를 품어준 따뜻한 남쪽 도시 통영에 대한 선물이 아닐까. 가족과의 생이별과 화구를 살 수 없는 정도의 찢어진 가난, 예술에 대한 열정과 시대와의 불화가 뒤섞인 나날들을 품어준 통영에 대한 보답이었으리라.
그는 자신의 예술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밀고나갔다. 그의 작품은 한국 보편의 정서를 건드림으로써 가슴을 울리고 있다. 그의 작품 통영풍경과 황소, 흰소와 부부는 반세기전 통영이 보여준 우정에 대한 선물이 아닐까? 통영은 그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고, 국민화가의 선물을 잘 가꿀 의무도 있다.
서귀포의 이중섭의 기념물들에서 해방과 전쟁과 피난, 기극한 가난, 가족과의 생이별 속에서도 피워올린 화가의 예술혼이 온몸을 전율시켰다. 가까운 통영에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중섭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중섭거리를 걸어 이중섭미술관에서 진품 황소와 60년 전 통영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이중섭으로 하여 ‘예향통영’은 더욱 빛날 것이다./한산신문 2015년 7월 23일 15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