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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가리왕산에서 옥녀봉을 보다
<독자기고> 가리왕산에서 옥녀봉을 보다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6.07.1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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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녀봉이 거제시의 안일한 행정으로 인하여 야금야금 살점이 뜯기고 풍력발전단지 조성 사업이 아직 백지화되지 않아서 유사 이래 가장 큰 수난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는 가운데 지난 6월 가리왕산에 올랐다.

이 산은 강원도 정선과 평창에 걸쳐 있다. 울창한 숲보다 원시림이 딱 어울리는, 1,561m 높이의 큰 산이다. 높이가 554.7m인 옥녀봉의 약 3배쯤이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 큰 산답게, 쭉쭉 뻗은 큰 키를 자랑하는 수십 미터의 나무가 빽빽하다. 첫눈에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처녀림이 따로 없다.

새벽녘인데도 숲은 벌써 깨어 있다.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아도 물소리, 바람 소리, 나무 소리, 새소리가 제각각 곁눈질하듯 앞을 다툰다.

감히 손댈 수 없는 깊은 원음이다. 다듬지 않은 그 자체다. 숲 향이 그대로 음을 탄다. 울려 퍼짐의 고저가 다르다. 그 색도 맛도 다르다.

그러나 아무런 간섭이나 부딪힘 없이 한데 섞여 어울린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화음은 싱그럽다. 숲이 연출하는 은은한 연초록 교향곡이다. 눈과 귀가 호강을 한다.

이에 뒤질세라 나뭇잎들은 맑디맑고 짙은, 풋풋한 산소를 뽐내듯이 내뿜는다. 신선하다. 콧속이 상쾌함에 마취된다. 사방이 온통 산소다. 아니 저장소다.

그 가득함이 경고한 듯 미세먼지는 미리 겁먹고 도망쳐 아득히 멀어져서 아예 얼씬도 못 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산소는 폐를 깊숙이 파고들어 온몸 구석구석으로 찾아든다. 온갖 나쁜 찌꺼기가 혼쭐이 난 듯 몸 밖으로 재빠르게 빠져나간다. 들숨 날숨이 신이 난다.

대우조선해양이 대기 중으로 내보내는 발암물질량이 지난해 언론보도에 따르면 연간 362톤, 하루 0.9톤이다.

그런데도 유해대기오염물질 측정소 하나 없다. 그야말로 무방비다. 수십 년간 조선소에서 나오는 발암물질을 고스란히 마셔 왔다. 또 매일 마실 수밖에 없다. 맛있는 과실을 얻고자 뿌리는 농약을 어쩔 수 없이 감수하고 마시라는 논리가 아닌가.

이 기막히고 얄궂은 운명으로 인해 오염된 이에게는 이 순간만큼은 그야말로 귀한 보약이요 소중한 항암물질인 셈이다.

조선소와 한 지붕 한 가족인 이들에게는 산이, 숲이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가를 웅변하고 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오염된 사회가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옥녀봉이 비록 가리왕산에 비해 작디작은 산일지라도, 도심과 가까운 곳부터 점차 숲이 사라져가고 있더라도 그나마 조선소를 바로 앞에서 늘 내려다보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보배 같은 투명한 산소를 마음껏 충분히 머금은 몸이 가벼워질 무렵,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로 다래 넝쿨이다. 넝쿨을 타고 이 나무 저 나무로 건너가고 싶은 충동이 꿈틀거리고 모처럼 어릴 적 동심이 인다.

다래나무가 지천이다. 아니 숲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 처음 보는 모습이라 가히 인상적이다. 기온 차로 이제야 꽃이 핀 놈이나 벌써 꽃을 떨구고 실하게 싱그러운 열매를 맺은 놈이나 자기 세상인 양 넝쿨을 마음대로 마구 뻗어 얽히고설켜 정글을 방불케 한다. 제멋대로라는 말이 어울리듯 여유가 살아있다. 한마디로 참 부러웠다.

그런데 자꾸만 옥녀봉 숲이 아롱거린다. 몇 해 전만 해도 다래 넝쿨이 저랬다. 하지만 봄철에 다래 순이 나자마자, 그 자리에 다시 돋자마자 마구 채취하는 바람에 다래나무는 연일 알몸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는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기심이 부른 이 결과가 어찌 다래나무뿐이겠는가.

숲 속을 조금 더 오르자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하소연할 겨를도 없이 이제는 대자연이 그린 그림이 넋을 잃게 한다. 숨을 멎게 한다. 높이가 25~35m 정도로 수십에서 수백 년 수령이 돼 보이는 거목인 잣나무 두 그루가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는 것이다. 등산로를 따라 산허리 여기저기 한두 그루가 눈에 띄었다가 이제는 보이지 않기를 바랄 무렵 또 보인다.

정상이 점점 가까워지자 연한 황백색의 박새 꽃이 군락을 지어 정상 코밑까지 응원하듯 반긴다. 그늘을 좋아해서인지 키 큰 나무숲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운 자태를 뽐내며 고개를 꼿꼿이 곧추세우고 있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세다.

바람이 거센 정상 부근에는 바짝 땅에 엎드린 초목만 보인다. 정상에서 멀어지자 어김없이 쓰러진 거목이 또 보인다. 잣나무다. 나뭇가지가 바람을 이기기 위해 짧아져 있고 한쪽으로 휘어져 있다. 모진 세월을 견딘 상처요 흔적이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반쯤 기울여 있어 뿌리 일부분은 아직 땅속에 박혀 있다. 살아나기를 기원할 수밖에 없다. 달리 방법이 없는 나약함이 싫지만, 원시림답게 숲은 숲이 치유한다는 말로 위로해 본다.

왜 저럴까?

가까이 가서 유심히 관찰해보니 대부분이 거목일 뿐만 아니라 뿌리 부분에 돌들이 박혀 있다. 아니면 하나같이 뿌리가 뽑힌 자리에 바위가 있다. 이런데도 저렇게 큰 나무로 자랐을까. 대자연의 섭리가 신비롭고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누울 자리 봐 가며 발을 뻗어야 하듯 자기 뿌리가 내릴 토양을 세심하게 살펴야 하는데 거센 바람이 심한, 척박한 산 정상이 아니라고 마냥 자기도취에 빠져 뿌리를 튼튼하게 깊고 넓게 내리기보다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무작정 키와 덩치만 키운 것이 쓰러진 하나의 이유가 아닌가 한다. 이 또한 대자연의 한 조각이리라.

이런 모습이 참 많이 우리의 삶과 닮아있다. 특히 수많은 선량한 이들을 고통과 좌절의 늪에 빠트린, 도덕적 해이는 물론이고 호의호식에 매몰돼 자기 정체성을 내팽개치고 본분까지 망각한 채 좌표를 제대로 읽지 못한 리더가 초래한 조선업의 위기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런 대자연 앞에 다시 숙연해진다.

옥녀봉의 보존, 풍력발전단지 백지화, 좌표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리더의 부재 등 이런저런 우려를 산과 나누는 사이 발은 어느새 마을에 와 있다. 마음의 짐을 잠시라도 기꺼이 받아 준 가리왕산을 떠날 채비를 하고 뒤로 돌아본다. 그 매력의 여운이 쉬이 가지지 않아 머릿속은 온통 다시 꼭 와야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래서인지 산을 좋아해서 산과 나누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위로가 되길래 "산은 아주 멋진, 참 좋은 친구"라고 평소 노래해 왔다. 가리왕산은 친구보다는 참 스승이다. 이 산은 그런 산이라 삶의 잠시 멈춤과 생채기 치유에는 안성맞춤이다.

이런 게 관광자원이 아닌가. 무엇이 따로 필요할까. 옥녀봉도 잘 가꾸면, 제대로 보존하면 언젠가는 이런 모습이리라. 희망을 품어본다.

그런 가리왕산이 떠나는 이에게 말한다. 산은 우리가 지켜야 할 유산이요 참 소중한 자산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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