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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해 통제사 녹봉으로 세병관을 증축하다
김응해 통제사 녹봉으로 세병관을 증축하다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6.02.2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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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해 통제사와 통영세병관 증축 시와 서문

<통영세병관 증축(增築) 시•서문(詩幷序) 김응해(金應海)통제사>

세병관은 이경준(李慶濬) 제6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고장 두룡포로 옮겨 온 이듬해인 선조 38년(1605) 1월에 기공하여 그해 7월 14일에 준공한 통제영의 객사(客舍)다. 조선시대의 객사는 절대왕권(絶對王權)을 상징하는 건물로 읍성(邑城)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도시계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경준 통제사가 세병관부터 지었던 것이다.

그 후 인조 24년(1646) 김응해(金應海) 제35대 통제사가 쇠퇴한 세병관을 보수하고, 규모를 크게 다시 지으면서 입구에 지과문(止戈門)을 세웠고 고종 9년(1872) 채동건(蔡東健) 제193대 통제사가 중수하였다. ‘통영세병관 증축(增築) 시•서문(詩幷序)’은 황호(黃㦿)가 1650년 즈음, 통제영에 와서 예전 영남어사와 동래부사 시절에 자신은, “재능 없는 어사에게 아첨하지 아니하였고 영남 남쪽 선박 건조 일을 감독하였다.”고 스스로 자찬하면서, 김응해(金應海) 통제사를 두고, “지혜로운 자는 일자리를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의심한다. 우리네를 두고 한 말이다. 예로부터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훌륭한 정치가 행해진다."고 칭송했다.

◯ 김응해(金應海 1588∼1666) 통제사는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서(君瑞),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 승지 지사(地四)이며, 형이 응하(應河)이다. 1616년(광해군 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희천군수(熙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後金) 정벌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등을 파견하자, 형 응하와 함께 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형인 김응하(金應河 1580∼1619) 장군(將軍)은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후금정벌에 나섰다가 명나라와 함께 대패하면서 전사하였다. 명나라 신종은 그를 요동백(遼東伯)에 봉했으며, 조선조정에서도 그의 전사를 가상히 여겨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무(忠武)로, 형제가 모두 무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응해(金應海)는 이후 1620년부터 강계부사·부령부사·인동부사·정주부사 등을 지내는 동안 청렴결백하여 칭찬을 많이 들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별장으로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켰다. 그러나 적병이 곧장 서울을 공격하자 그는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진로를 막고 고군분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적에게 포위되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겨우 살아났다. 그 뒤 1644년 갑신년 경상우병사가 되었고 1646년에 통제사(統制使)로 승진 되었다가 1648년 2월 통제사 임기가 만기되어 돌아갔는데 그 해 1648년 어영대장(御營大將)겸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제수 되었으며 이후에 특별히 총융사(摠戎使)되었다.

김응해 통제사는 70세가 넘어서야 고향 철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666년 병오년 2월15일 경기도 철원에서 79세로 사망해 선영(先塋), 경기도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하갈리(下葛里)에 안장됐다.
그의 직계후손 중에는, 제85대 1711년 김중원(金重元,善卿 ?∼1716) 통제사, 104대 1733년 김집(金潗) 통제사, 116대 1754년 김윤(金潤) 통제사가 있다. 또한 후손 김광(金洸)은 1737년(영조 13) 윤달9월 20일 임기 만료된 제105대 윤택정(尹宅鼎)의 후임으로 삼도수군통제사(統制使)로 교지를 받았으나 이내 동지의금부사 이종성으로 바뀌었다가 12월23일 제106대 구성익(具聖益)으로 확정되어 부임하지 못하였다. 어찌되었건 조선후기 조선의 이름난 무장(武將)집안으로써 통제영과 인연이 깊은 분이었다.

 
<김응해(金應海) 통제사 신도비명>
기운은 전일(專一)하고 용맹은 깊으며 세운 것은 공손하고 마음은 조심했다.  조심하는 것은 오직 이것에 있으니 창자에 가득한 빛나게 붉은 충성이었다. 의리에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요행으로 나는 것을 영화롭게 여기지 않았다. 확실하게 돌보다 더 단단하게 마음을 지켰으니 이것이 위로 푸른 하늘에 이르렀네. 부절(符節)을 차고 절개를 세웠으니 어느 곳에 빙벽(氷蘗)을 쓰지 않으랴. 그 길이 빛나 돌에 새겨 드리운다. [氣專而勇沈 樹惇而心欽 欽惟其有是 兮滿腔子赫 然丹忠不畏義死不榮幸生兮確乎介 石之守上格 蒼穹佩符建 節何處不用 氷蘗兮其永垂光于樂石] / 판중추부사 용주 조경(判中樞府事 龍州 趙絅).

 
<김응해(金應海) 통제사 묘비명>
심하(深河)의 버드나무에는 무지개가 있어 해가 비쳤고, 동선(洞仙)의 돌에는 칼이 있어 피가 나부낀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았으니 두 어려움이 같은 절개일세. 임금은 그 충성을 힘쓰게 하기 위하여 여러 번 병기를 잡게 했고, 나라에는 외적을 막을 장수가 있는데 머리털이 희게 세었네. 간단한 상소로 고향에 돌아갔으니 내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하늘의 기러기는 더욱 멀리가고 높은 바람은 멀리서 불어온다. 후손들이 무관(武官)이 이어져서 산서(山西)가 대마다 나왔다네. 철원(鐵原)의 가파른 바위에 그 뼈를 묻어, 돌은 때로 깎여지지만 이름은 없어지지 않으리라. / 대제학(大提學) 홍량호(洪良浩 1724∼1802).

◯ <통영‘세병관 시•서문’ 내용 요약>
김응해(金應海)통제사는 쇠하고 허물어져 가는 세병관에서 직무를 보지 못할 정도로 쇠하여 객사에서 업무를 보았다. 그래서 세병관을 증축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봉급을 손수 세병관 증축 비용에 보태고 재물을 아껴 모아 경비로 조달했다. 그리고 불도들로부터 장인(匠人)을 모집하고 일 없는 자들을 품팔이로, 여러 기술자들은 일을 알맞게 품팔이를 시켜 지휘했다. 통제사가 직접 지휘 감독하며 재촉하니, 초여름에 집을 짓기 시작해 가을 이전에 끝냈다. 국내에 관사로 이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웅장하게 되었다. 통제사는 이참에 군대의 대검열을 받기 위해 격문을 돌렸는데, 기존 통제영의 경상우수영과 함께 경상좌수영 전라좌수영에서 선단이 도착했다. 뱃고물에 그린 청작 황룡의 거북선이 전라우수영에서 왔고 경상좌수영에서 전함과 거룻배의 일천 돛대와 일백 선단이 왔다. 또한 두 도(道)의 주현(州縣) 대부(大夫)와 절제만호 및 강인한 병졸과 삼로(三老) 모두가 왔다. 이에 세병관 증축에 따른 행사로, 통영 강구안에서 군점(軍點)을 행하고 세병관에서 의식을 올리게 되었다.

대검열 군점(軍點)을 시작을 알리자, 통제사 김응해가 군령(軍令)에 따라 호령하길, “초나라에서 맨 앞장선 군대는 날카로운 기세로 진군하고 중간 군대는 전투의 계획과 책략을 지휘하며 후방군도 대열의 끝을 굳세게 지킨다"하며 단단히 경계하도록 타일렀다. 물고기가 떼를 지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둥글고 긴 대형 진법으로 배치하고, 중군의 관(鸛황새)과 아(鵝거위)의 군진(軍陣)으로 진을 치며, 친히 북을 두드렸다. 사나운 천둥소리로 명령하니 바다 물결이 일어섰다. 또한 객관의 문을 열어 관청에서 앉아 대검열의 일을 볼 수 있었다. 옛 군대에서 세 번 호령(號令)하고 다섯 번 거듭 일러주듯,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자세히 명령했다. 전라좌수영 경상좌수영의 장수 이하로부터 투구 바지 신발 칼과 활집을 차고 흙다리 위를 분주히 다니며 차례로 의식을 행했다. ‘군인은 나태함을 물리치고 규율에 따라야 하며 각자가 맡은 위치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음식과 술잔을 낱낱이 내었고, 좌측엔 대나무 패, 우측엔 도끼, 나무 공작을 창에다 꽂아 놓았다. 틈틈이 제기 그릇과 종과 북의 위치를 가지고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이제는 칼날처럼 깔끔히 정리되었다. 이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우암 송시열이 초야에서 학문을 몰두하다가 마침 통제영에 이르러 삼도수군의 검열에 참여하여 이를 도왔기 때문이다. 이어 병선 마당에서 검무(劍舞)와 병사를 사열했다. 이후로 삼도의 주현(州縣) 대부(大夫)와 절제만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확신에 찬 군인 정신과 군율을 갖게 되었다. 옛말에, “지혜로운 자는 일자리를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의심한다.” 또한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훌륭한 정치가 행해진다."고 일컫는 바, ‘이는 김응해 통제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는 가문 대대로 등용되어 충절이 드러난 집안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통영세병관 시•서문을 함께 싣다.(統營洗兵館詩幷序)> 황호(黃㦿,1604∼1656)
우리나라는 통제사가 없었는데 선조 때부터 비로소 있게 되었다. 선조 시절 섬 오랑캐에게 큰 혼란을 당하여 수군장수 이순신이 적을 속이는 길목을 노리는 전술로 막아 큰 공로가 있었다. 이제야 특별히 이 이름을 수여한다. 여러 도(道)를 통제토록 하고 관제로 삼았는데 오늘까지 이와 같다.

지금의 진영은 옛 장소가 아니다. 통제사 이경순이 해안 방어의 깊은 이치를 헤아리고 지리적 조건을 고려해 아뢰었는데 조정의 회의에서 그대로 따랐다. 이로부터 통영이 되었고 저 통제사가 이미 여러 도(道)의 장수를 통제했다. 여러 도의 장수가 봄과 가을에 인솔하는데, 세 방향(삼도)의 군사들인 천부장(千夫長) 무리가 서둘러 진영에서 대표로써 수급하고 약속한다. 조금 있다가 제사 그릇을 준비하나 진영에는 객사가 없어 허락 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세병관이 지어져, 하늘의 세력이 왕성한 제도를 갖추게 되었다. 어찌 외관만 아름답다 하리오. 객사는 장엄함과 아름다움이 더하니 여러 도(道)에서도 으뜸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지붕을 이지도 않았고 날로 기울고 무너짐이 심해져, 보좌하는 담에 붙어 있어 위태로워서 걱정스레 말하길, 이는 다만 아침저녁마다 겨우 버티어 가는데 곧 바람에 날려 부러질 듯, 솥에 데일듯하다. 곡식이 여물어 가는 동안에 그 비용을 어찌할꼬. 금년 병술년 1646년 봄, 이전 통제사가 임기 만료를 고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이 후임 통제사에 대해 의논했다. 김공(김응해,金應海 1646년3월~1648년3월 통제사 재임) 그 사람을 생각하였고 병마절도사로부터 뽑았다. 두서너 달이 지나 무릇 여러 도(道)의 장졸들이 공을 따랐고 평소부터 공의 은혜와 위엄이 일상화되어 얼굴빛이 새로이 바뀌니 군정이 빠르게 정돈되었다. 공은 객사의 집에서 관을 쓰고 공무를 보았다. 개탄스런 마음에 더불어 보좌하고 의논하며 말하길, 이 또한 국경의 일이며 빈객의 예이다. 이로부터 군민이 묻고 의논하였는데 죄다 폐함이 옳다한다. 이는 그것이 없어짐이다. 여러 공들이 허물을 스스로 좋아했는지 뒤돌아보았다. 재물을 헛되이 쓰고 많은 사람들을 고생시키며 거두어들이기만 하지 않았나. 그러므로 큰 역사를 이루기 어려운 자가 아니더냐. 책임을 맡지 아니하고 두려운 마음에 못 쓰게 되었다. 또한 길가는 비적에게 묻는 것과 같은 자가 아니었던가. 많은 사람이 함께 정사에 귀가 쏠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귀신을 부려서 큰 조개가 숨 쉬게 하도록 하였더니 이후에야 알아들었다. 이러니 어찌 재난이 있으리오. 나는 반드시 새로이 증축해야겠다. 혹 어떤 이가 말하길, 많은 사람이 필요하고 비용이 많이 들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다. 모두다 어렵다한다. 공은 심사숙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차 헐뜯음은 어찌할꼬.

공이 말하길, 나는 군민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다. 응당 비용은 공공재가 아니지만 또한 빨리 마련할 수 있다. 헐뜯는 자, 무엇을 근심하리오. 마침내 궁리를 물리치고 모두 마음을 모아 의논하였다. 퇴직한 관리가 신묘한 계책을 내놓았다. 먼저 그 쌀로 받는 봉급을 물리치니 재물이 얼마 후에 갖춰졌다. 이에 불도들로부터 장인(匠人)이 모이고 일 없는 자들을 품팔이로 모집했는데 무리들이 잘 따르지 아니하였으나, 여러 기술자들이 애써 서로를 배려하니 장인(匠人)들이 일을 알맞게 품팔이 할 수 있었다. 수령이 새끼손가락으로 번번이 구멍 가운데를 쿡쿡 계속 찌르니, 초여름에 집을 짓기 시작하여 가을 이전에 끝냈다. 웅장하게 지으니 여러 고을 감영 객관들을 업신여길 정도였다. 즉 국내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군대의 대검열을 받을 만한 적합한 객사(관사)가 되었다. 공이 이르길, 나는 여러 도(道)와 해도(海島)를 거느리는 곳에서 멀리 옮겨 일을 시작했다. 예전부터 해마다 봄과 가을에 군점 행사로 모인 우리 군민이 힘써 두루 노력했다 말할 수 없다. 근자에도 지난번 소식과 일에 따라 마침내 격문을 만들었고 두 도(道)에 격문을 보내 알렸다. 뱃고물에 그린 청작 황룡의 거북선이 전라우수영에서 왔다. 경상좌수영에서 전함과 거룻배의 일천 돛대와 일백 선단이 왔다. 두 도(道)의 주현(州縣) 대부(大夫)와 절제만호 및 강한 병졸과 삼로(三老) 모두가 왔다. 이윽고 기일 안에 모였다. 공은 “초나라에서 맨 앞장선 군대는 날카로운 기세로 진군하고 중간 군대는 전투의 계획과 책략을 지휘하며 후방군도 대열의 끝을 굳세게 지킨다"하며 단단히 경계하도록 타일렀다. 물고기가 떼를 지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둥글고 긴 대형 진법으로 배치하고, 중군의 관(鸛황새)과 아(鵝거위) 군진(軍陣)으로 진을 치며, 친히 북을 두드렸다. 사나운 천둥소리로 명령하니 바다 물결이 일어섰다. 또한 객관의 문을 열고 관청에 앉아 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옛 군대에서는 세 번 호령(號令)하고 다섯 번 거듭 일러주듯, 여러 차례 되풀이하며 자세히 명령했다. 두 도(道)의 장수 이하로부터 투구 바지 신발 칼과 활집을 차고 흙다리 위를 분주히 다니며 차례로 의식을 행했다.
 

근면함을 장려하고 나태함을 물리치니 모두가 군대의 기율이 있게 되었다. 그러한 뒤 각각 맡은 위치로 돌아갔다. 음식과 술잔을 내어 이에 낱낱이 들었다. 좌측엔 대나무 패, 우측엔 도끼, 나무 공작이 창에 꽂아 있다. 틈틈이 제기 그릇과 종과 북을 가지고 예전에 집안에서 싸우고 서로 다투듯 했는데 이제는 넓디넓어 칼날을 놀리는 데도 여지가 있듯, 칼을 자유자재로 다룬다. 옛날에는 이것이 무엇이냐 말했고 지금도 이것이 무엇이냐 말했다(여러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날 보았던 여러 장수들이 새삼스러워진 광경에 깜짝 놀라지 않는 자가 없었다. 우암공 송시열이 보좌하였고, 이에 모두가 탄식하며 말하길, 우리 진영은 제멋대로 하면서 스스로 옳다고 여겼다.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이러한 객사가 있었다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지난해 재능 없는 어사에게 아첨하지 아니하였고 영남 남쪽 선박 건조 일을 감독하였다. 공은 실로 우도병마절도사로써 선박을 갖추길 청하였고 무능하게 계략하는 자를 죄다 청하였다. 끝내 구제함으로써 머물러 떠나지 않았다. 편히 살 수 있던 공이 이르길, 고을 수령의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지 말라. 명성을 좋아하는 사람과 견주는 것은 아니나, 마침내 일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재능이 없다하여도 능히 의심이 없을 수 없어, 이와 같이 공을 보좌하며 말한다. 또한 세병관 증축이 여러 도(道)에 알려졌는데 그 장수들이 비용이 문제였다고 말하나, 나는 (그 비용에 따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군민의 많은 부역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나의 마음에는 동요함이 없다(확신한다). 주현(州縣) 대부(大夫)와 절제만호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랫동안 나에게 그 어려운 사정이 없었다하니 지금 이후로 나는 미심쩍음이 없게 되었다. 전언에 따르면, “지혜로운 자는 일자리를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의심한다.” 우리네를 두고 한 말이다. 예로부터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훌륭한 정치가 행해진다."고 일컫는 바, 헛말이 아니었다. 공을 보좌하는 사령이 와서 말하기를, “객관의 일을 당연히 기록해야하며 자식들이 이제 공을 따르는 무리가 되었다.”한다. 그때 따랐던 자식들의 기록이다. 나의 어리석음에 사례한다.(나의 부족함에 죄송하다) 이어 시를 지어 붙여 놓지 못했으나, 장차 저 찾아오는 자들을 경계하도록 해야 한다. 공의 이름이 김응해로 모 고을 사람이었다. 가문 대대로 등용되어 충절이 드러난 집안이었다.
[我鮮故無統制使 有之自我宣廟始 宣廟中當島夷之大訌 水軍帥李舜臣遏方張之衝 有大功勞 於是特授之是號 使統制諸道 著爲官制 至今仍焉 今營非古所也 統制使李慶濬揆度海防之孔道 相地利以聞 廟議報可 於是爲統營 夫統制使旣統制諸道帥 諸道帥春秋帥其屬千夫長若三方之賦 趣營下受約束 已又講俎豆之容 營不可以無館 於是爲洗兵館而有大壯之制焉 豈直爲觀美己哉 館敌壯美 甲于諸道 紀積不葺 頹圮日甚 裨佐負壁 懍懍懼曰 是猶可朝夕支吾 卽如拉然割然而鼎創 其費則那者且稔矣 今年丙戌春 統制使告瓜及 上與大臣謀帥 惟金公其人 由兵馬帥擢 旣至之數月 而凡諸道將卒屬於公者 素習公恩威 立新氣色 克趨戎政 公臨館之堂皇 慨焉與裨佐議曰 疆埸之事于斯 賓客之禮于斯 軍民之咨諏于斯 斯而可廢 此亡它 顧諸公過自好 欲無受勞衆費財名 不者大役難成 恐中廢不任 又不者如匪行邁謀 與衆爲政耳 如此則使鬼設蜃噓而後可 詎有日哉 吾必拓而新之 或曰衆 或曰費 或曰久 僉曰艱哉 公不三思 將如訾訾何 公曰吾能衆而不以軍民 能費而不以公財 且能亟也 何憂乎訾訾者 遂屛匠而謀諸心 退吏而用神算 先斥其俸廩而財已辦矣 迺鳩工于緇流 徵傭于游手 而衆不可勝使矣 撙勞均力 工傭稱事 大令小指 輒鑿鑿中窾 經始維夏 秋乃告訖 其大壯之制 亡論諸道館 卽國中無與二焉 館成適當大閱之期 公謂吾所統諸道海道寫逖 每歲以春秋會 勞吾軍民 無庸遍閱 且從近者先便 遂爲檄 檄二道曰湖右而以靑雀黃龍龜艦來 曰嶺左而以艨艟舴艋之千檣百綜來 曰二道▣州縣大夫節制萬戶及而之勁卒三老皆來 旣集如期 則公爲之飭前茅慮無中權後勁 爲之置魚麗鸛鵝之陣而親鼓之 發號雷厲 溟波起立 又爲之闢館坐堂 三令而五申之 自二道帥以下 兜鍪袴鞾 握刀䩨箙 奔走循圯而上 行禮以序 奬勤黜惰 咸有其紀 然後各就于位 犒觴乃擧 左節右鉞 樹羽植矛 間以籩梪鐘鼓 昔勃谿相攘 今恢恢乎有餘地矣 昔謂斯何 今謂斯何 是日諸將見者 莫不洒然改觀 尤嚴公者(尤庵公者) 而公之裨佐乃咸歎曰 吾營自是有使 而吾使能有是館云 余不佞前歲承乏繡衣 董嶺以南造舟之役 公實爲右道兵馬帥 請公辦舟 又請餘爲不佞計者 果賴以濟 居平謂公於縣官事 靡所不任 而非如自好者比 及是役也 雖不佞不能無疑若公之裨佐之說 又聞之諸道 其帥則曰費鉅矣 其無索我 其民軍則曰役衆矣 其無動我 以至州縣大夫節制萬戶 皆曰久則其無困我 而今而後吾方釋然 語曰知者作事 愚者疑焉 其吾儕之謂歟 古所稱人存政擧 非虛語耳 公之裨佐使來謂曰 館宜有記 子今爲公屬 屬子記 余謝不敏 不獲而系之以詩 且將以規夫來者 公名應海 某州人 家世用忠節顯]

<시에 이르길(詩曰)> 통솔은 사람을 바꿈에 있으나 어려운 것이다. 어지러운 법도가 중요한 게 아니고 편안케 해야 함이다. 명예를 돌아보고 뜻을 이행하라. 직무와 그대의 관리를 이겨내라. 혹 구차하게 녹봉만 받으랴. 강구안이 곱다고 하지 말라. 오직 집에서 융숭한 대접으로, 마음 깊도록 관대하다고 어찌 높고도 빼어나다 하리오. 다른 이가 말하길, “새삼스럽다. 하물며 저 험준한 지세에 들보가 휘니 탄식이 나온다.” 모든 물건을 헐어서 완전할 때까지 시기를 기다렸다.
공(김응해)이 조용히 풀을 베며 공(功)을 만들 듯, 장식한 후에 그대가 움직이니 큰 그릇엔 어긋남이 없었다. 누가 노역 대중이라 하겠는가? 누가 재물이 없다 하겠는가? 누가 오래 걸린다 하는가? 눈 깜짝할 사이에 곳간이 겹겹이 쌓이고, 군사는 몹시 바빠 변방의 지경이 통솔되어 비로소 완성되니 기뻐하게 되었다. 그대가 벌써 다 지었다고 알렸다. 벼슬살이는 참으로 고된 것이다. 아~ 모두를 거느리는 법도였다. 물가가 헛되이 병들었더라도,
공이 관사에만 있었는데도 배의 선두와 선미에 관문을 만들었다. 노 젖는 이가 엄청 많고 굳센 병사가 용맹하였다. 사이좋게 서로를 도우니 오랑캐가 가까이 못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했다. 급히 이리저리 (배를 몰아) 떠다니데 되었다.
공이 관사에만 있었는데도 큰 바다 빙 둘러 방탕함이 없는 형상이니 이로써 그 물결을 보니 물이 격하게 흐르는 듯하다. 어찌 그 여울을 없애랴. 산하를 두루 돌아보며 쓰린 마음으로 손에 침을 바른다.
공이 관사에만 있었는데도 높고 정렬된 산과 심히 견주랴. 공이 떠나가매 누가 이 제단에 제를 올릴까?
공이 관사에만 있었는데도 가난하고 절제 있는 선비를 가려내고 도망친 나를 숨겨 지켜주었다. 장차 공이 돌아오면 어찌하리오. 오래된 상자에 넣어 송축하리다.
어찌 (그 공적을)새겨 넣지 않으리. 나는 글을 넣지 않은 상자를 두드리며 재빨리 화살 구멍을 살폈다.

 

[統於人易 統之則難 制亂非貴 制之在安 顧名思踐 克官厥官 苟或尸居 鮮弗江顏 維屋渠渠 潭潭且寬 豈不巍魏 由人改觀 矧伊震崚 棟撓興歎 凡物有毀 待時乃完 公來其徐 鞠爲草菅 公運意匠 目無錯盤 孰謂役衆 孰謂財殫 孰謂久玩 咄嗟之間 問廥陳陳 問師閒閒 問之屬部 始疑終懽 公謂旣作 居之斯艱 繄統以制 得靡曠瘝 公在在館 舳艫爲關 櫂夫如林 彪士桓桓 好我胥濟 不卽獠蠻 苦樂與共 遑于遊般 公在在館 瀛海是圜 無蕩之形 而見其瀾 如激以潏 胡殺其湍 顧瞻山河 唾手心酸 公在在館 比重巑岏 公之去矣 誰陟茲壇 公在在館 大庇風寒 失我屛幪 將奈公還 匪古善頌 曷稱不刊 余椎不文 矢口惟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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