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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발전과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
지속가능발전과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9.03.2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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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발전 전국대회 준비에 여념 없는 ‘거제지속협’

 

거제시민에너지협동조합 상임이사 윤양원

올해 9월 거제시에선 전국 규모의 지속가능발전 대회가 열린다. 이 대회의 준비를 위해 거제시 지속가능발전협의회(이하 ‘거제지속협’)는 지난 12월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100인 토론회’를 개최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정리해 발표하기도 했다.

또 최근엔 ‘지속가능발전의 이해’를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전국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거제지속협’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란 모호하면서도 중의적(重義的)이고, 심지어 철학적이기까지 한 이 단어가 ‘발전(development)’이란 지극히 친자본적이고 시장친화적인 어휘와 결합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식차이는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지속가능발전의 의의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미래세대의 필요(NEEDS)를 충족시킬 능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현세대의 필요를 충족하는 발전"이다. 이것이 1987년 국제연합환경개발회의(UNCED)가 정의한 ‘지속가능한 발전’의 의미다.

물론 이 정의를 언뜻 보면 ‘지속가능발전’이 경제 분야에 국한되는 제한적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발전’이 다루고 있는 분야를 살펴보면 그럴 가능성은 없다.

 

 

지속가능발전의 17대 목표

‘지속가능한 발전’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총 17개의 목표가 있는데, 개별 목표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목표 1은 ‘모든 곳에서 모든 형태의 빈곤의 증식을 막는 일’이다. 목표 2는 기아의 종식과 식량안보의 달성, 그리고 개선된 영양상태의 달성과 함께 지속가능한 농업을 강화하는 일이다.

목표 3은 전 연령층의 건강한 삶의 보장과 웰빙을 증진시키는 일이다. 목표 4는 포용적이고 공평한 양질의 교육을 보장하고 평생학습의 기회를 증진하는 일이다. 목표 5는 성평등 달성이다.

목표 6은 물과 위생설비에 대한 지속가능한 유지·관리의 보장이다. 목표 7은 지속가능하며 현대적인 에너지에의 접근성 보장이다. 목표 8은 지속가능한 경제성장과 생상적인 완전고용과 양질의 일자리 증진이다.

목표 9는 복원력 높은 사회기반시설을 구축하고,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산업화의 증진과 혁신에 대한 장려다. 목표 10은 국내 및 국가 간 불평등의 감소다. 목표 11은 도시와 주거지를 포용적이며 안전하고 복원력 있고 지속가능하게 보장하는 일이다.

목표 12는 지속가능한 소비와 생산양식에 대한 보장이다. 목표 13은 기후변화와 그로 인하나 영향에 맞서기 위한 긴급한 대응능력 증진이다. 목표 14는 대양과 바다, 그리고 해양자원의 보존과 지속가능한 사용이다.

목표 15는 육상생태계 보호와 복원 및 삼림의 지속가능한 관리와 생물다양성 손실을 중단시키는 일이다. 목표 16은 평화롭고 포용적인 사회 증진과 모두를 위한 정의에의 접근 제공, 그리고 효과적이고 책임성 있는 포용적 제도의 확보다. 마지막으로 목표 17은 이 모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이행수단의 강화 및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십 활성화다.

물론 이 17개 분야엔 다시 이를 실천하기 위한 개별적인 세부목표가 169개나 있다.

17개의 지속가능발전 목표를 찬찬히 살펴보다 보면 마치 이것이 유토피아를 찾아가기 위한 안내지도 같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너무 좋은 건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사실을 우린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난해하고도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전 세계가 하나로 뜻을 모았단 사실은 인류사에 있어 아직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지속가능발전이 인류의 미래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단 뜻이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발전’과 지속가능한 ‘성장’이 동일한 개념으로 취급되고 있는 듯한 상황에 대해선 딴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지속가능한 성장은 지속가능한가?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기본적으로 생태학적 개념이다. 지속가능성의 개념적 정의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듯, ‘미래세대의 필요(NEEDS)’란 경제적 성장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시장자본주의식 성장이 지속가능발전의 필요충분조건이라면, 이는 생태적 자본 또는 자연 자본의 한계란 벽을 만나 좌절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개념이 태동하게 된 시발점인 ‘성장의 한계’란 보고서를 통해서도 이미 70년대 초에 지적된 바 있다.

이 보고서의 작성에 참여한 로마클럽 회원의 한 사람인 ‘요르겐 랜더스’는 최근 저서인 ‘더 나은 미래는 쉽게 오지 않는다’를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거시경제도 생물체계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자연 생태계란 더 큰 경제의 일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자연자본의 한계가 명확해진 현 시점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야기 하는 것은, 한마디로 지속가능성의 가치에 대한 오해와 개념의 혼동에서 발생한 논리적 모순에 가깝다.

결국 ‘지속가능한 성장’은 지속가능하지 않단 뜻이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발전’은 ‘지속가능한 성장’과 동일한 개념이 될 수 없으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선 경제적 성장의 개념에 대한 명확한 재정립이 필요함을 지적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화석연료 기반의 지속가능한 경제적 성장’ 대신 ‘지속가능한 행복’을 최고의 목표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지속불가능한 에너지의 소비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한 시대가 누리는 문명의 하부구조엔 경제가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본질적 문명의 하부구조인 경제를 빼고 해당 문명을 이해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문명의 하부구조를 공고히 떠받치고 있는 동력, 즉 어떤 에너지원의 사용을 통해 그 경제가 유지되고 있는지를 간파하는 건 해당 문명의 특질(特質)을 파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화석연료는 21세기 현생 인류의 삶에 있어 알파와 오메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석유와 석탄의 소비를 통해 밥을 먹고, 자동차를 굴리며, TV를 본다. 물을 마실 땐 석유찌꺼기에서 나온 플라스틱 컵을 쓰며, 심지어 그 속에 담긴 물 또한 화석연료에서 생산된 전기를 통해 정화되고 운반된단 사실을 생각하면, 사실상 우리 삶에서 화석연료를 빼면 가능한 건 그저 꿈을 꾸거나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정도에 그칠 지경이다.

이처럼 에너지는 인간의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우리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컴퓨터를 가동하는 데 필요한 전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단 사실을 생각하면, 사실상 에너지는 인류 문명의 총아(寵兒)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인류가 화석연료를 주요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이 지속불가능한 에너지원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다.

이런 주장에 혹자는 반론을 제기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석유의 고갈시기가 언제가 될지, 그리고 그 전에 대체 가능한 에너지원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지와 같은 주변적 사안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재난의 수위가 높아지고, 한편으론 미세먼지와 같은 비경제적 외부효과가 우리 경제의 성장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등, 우리는 지금 자연자본의 총체적 고갈 상황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식수준은 위태로운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속 불가능한 에너지원의 사용으로 인한 부가가치가 그로 인해 발생된 생태적 비용 보다 크다면, 최소한 그 경제시스템 속에서 해당 에너지원의 사용은 지속 불가능하다. 이익 보다 비용이 더 큰 경제는 ‘비경제(非經濟)’기 때문이다.

이 이론의 실증엔 고차원의 방정식과 복잡한 대수학이 끼어들 틈 같은 건 없다. 이는 그저 우리의 눈과 피부와 호흡기만 있으면 확인 가능한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생태적 비용 발생을 통해 생성된 부가가치를 누가 더 많이 가져가고 있는가와 같은 매우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

 

생태 정의와 에너지 정의

사실 따가운 눈과 호흡의 불편함을 감내하는 고통 보다 더 큰 부가가치를 가져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이 상황의 가해자(또는 원인 제공자)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화석연료 기반의 경제시스템 속에서 발생한 부가가치의 합은 그가 소비한 지속불가능한 에너지의 양에 비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관념 속에 오래도록 자리잡고 있는 전통적 정의의 개념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쓰레기를 버린 사람에게 치울 의무를 지우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화된 사회적 정의다. 하지만 기후변화와 미세먼지 같은 경제활동의 외부효과와 자연자본 고갈로 인한 생태적 파산책임을 원인 제공자에게 묻기 어려운 게 우리가 신봉하는 시장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한계다.

무너진 에너지 정의는 곧 생태적 정의의 붕괴를 가져오고, 결과적으로 자연자본의 고갈에 직면해 우리의 경제시스템은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제 지속불가능한 에너지 사용량은 지구 생태계의 수용한계(또는 회복력의 한계)를 초과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속불가능한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지금의 시스템을 지속가능하게 할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무너진 에너지 정의와 생태 정의를 외면한 채 현행 경제시스템을 유지하는 일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속가능한 경제를 위한 좀 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한 이유다.

 

엔트로피 법칙과 에너지 전환의 과제

열역학 제2 법칙은 모든 에너지는 사용을 통해 유용한 형태에서 무용한 형태로 전환되며, 그 과정은 불가역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를 ‘엔트로피의 법칙’이라 하는 이유는 사용된 에너지의 양에 상응하는 오염(무질서)이 외부로 배출되고, 그 총량은 필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엔트로피 증가는 생태계 질서의 혼란을 점점 더 가중시킬 것으로 보인다.

대기 중 온실가스 증가로 인한 지구온난화와 이로 인한 해수면 상승, 그리고 생물다양성의 감소와 극한의 국지적 기상이변 등 지구 생태계의 무질서는 해를 거듭할수록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엔트로피 증가는 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 문명의 하부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에너지원의 전환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더불어 시급한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에너지 전환은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과업이 아니다. 친환경적인 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해선 친환경적이 아닌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현행의 에너지 믹스 속에서 에너지 전환을 추구하는 일은 그만큼 많은 엔트로피의 외부배출을 필요로 한다. 최소한 에너지 믹스의 비중에서 친환경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어서는 지점까지 엔트로피 배출의 증가를 막을 방법은 없다.

에너지 전환은 침몰하는 잠수함에서 물을 퍼내는 일에 비유될 수 있다. 물을 빨리 퍼내려면 많은 운동량이 필요하고, 운동량의 증가는 산소 소비의 촉진을 유발한다. 결과적으로 물을 빨리 퍼낼수록 남은 산소는 더 빨리 줄어드는 꼴이다.

물론 구조선이 때맞춰 와준다면 승조원 전원이 생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구란 고장난 잠수함을 구해줄 구조선은 어디서도 오지 않는다. 그건 우리의 희망과 욕심이 만들어낸 유토피아적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린 빠른 시간 안에 아가미로 호흡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에너지 전환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란 뜻이다.

 

에너지 전환 없인 지속가능한 발전도 없어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인한 외부효과가 경제성장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일이 잦아지며, 전 세계는 지금 성장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최근 들어 지속가능발전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의 지속가능발전을 ‘성장 중독’으로 부터의 탈피가 아닌 과거의 성장을 지속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엔 동의하기 어렵다.

숨 쉴 수 있는 깨끗한 공기와 오염되지 않은 물은 더 이상 무상으로 제공되는 자유재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장경제시스템을 통한 지속적 성장을 위해선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지출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비용이 늘어나는 만큼 생산의 부가가치는 줄어들고, 그에 비례해 성장의 속도와 폭은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이 현상이 반복되어 외부효과로 인한 비용의 상승이 부가가치의 증가 속도를 넘어서면 우리의 자본주의식 시장경제시스템은 붕괴하게 된다. 따라서 경제의 하부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에너지원의 전환 없이 지속가능한 발전은 불가능하다. 엔트로피 배출이 없는 에너지로의 전환이 시급한 이유다.

단, 전환에 걸리는 시간 동안 우리가 감내해야 할 고통의 크기는 사회적 정의의 수용 가능성 안에서 분담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의 불가피성에 대해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정의를 내린 지속가능전문가 앨런 나이트의 선언을 남긴다.

“지속불가능성은 지속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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