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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열 교육칼럼) 꿈꿀 시간은 주자
(이승열 교육칼럼) 꿈꿀 시간은 주자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9.03.1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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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거제시교육장

 

동물의 새끼보호 본능은 대단하다. 특히 고양이의 모성애는 따라올 종이 없다.

우리 집에는 길냥이들이 떼로 살고 있다. 밥은 집에서 얻어먹고 우리들의 손길은 거부하고 피해버리니 온전한 길냥이는 아니고 반쯤 집고양이인 셈이다.

어떤 때는 한 7마리쯤 살다가 때가 되면 두서너 마리만 생활하기도 하는데 새끼를 낳고 난 후 한 6개월 정도에 가장 대식구를 이룬다.

그 후에는 자연적으로 분가하기도 하여 개체 수가 자연적으로 조정된다.

고양이 밥이 우리 쌀값보다 더 들지만 내치지 못하고 시주하듯 먹이며 산다.

그런데 어미 고양이가 새끼들을 간수하고 교육하는 걸 지켜보고 있노라면 경이로움마저 생긴다. 아빠 고양이도 내내 옆에서 가족을 지키는데, 어느 정도 걸음마를 하게 될 때가 되면 쥐의 사체가 고양이 집 곁에 놓여 있곤 한다. 사냥을 가르치는 도구일 것이다. 먹이사슬이 엄격한 자연에서 생존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바로 그들의 야생교육인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신하는 우리들 세계로 가 보자.

90년대 초, 모 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당시만 해도 선도부원들이 학생부 교사들과 교문지도를 철저히 했다. 혹시 지각하는 학생이 있으면 운동장을 돌게 하든지 청소를 시키는 등 가벼운 벌을 주는 것이 규칙이었다.

지금은 교문지도는 지양하고 교문맞이를 하는 추세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어느 날 아침에 등교 시간을 한 5분쯤 넘긴 시간, 급하게 승용차 한 대가 교문 앞에 섰다. 그리고 여린 남학생 한 명이 내려 교문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선도부원 선배들이 불러서 지각생 대열에 합류시키려고 데리고 가기 직전, 차에서 내린 아버지가 화를 불같이 내며 선도부원의 머리를 한 대 쳤다. “겨우 몇 분 늦은 걸 가지고 내 아들을 감히 잡느냐”며 고함을 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급하게 내가 제지하며 소란을 마무리 지었다. 소임을 다 하려는 선도부 학생들만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겨우 진정이 된 아버지는 돌아가고 지각생들은 가벼운 벌을 받은 후 교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끝났다. 요즘 같으면 폭력에 해당할 것이지만 그 시절에는 화해하면 끝이었다.

몇 달 후, 테니스장에서 그분과 조우했다. 나쁜 기억이 있던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은 무척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몸가짐 좋고 점잖으며 사려 깊다고도 했다.

그랬다.

자식 문제 앞에서는 미처 배려도 예절도 작동되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나를 비롯해 누구나 다 그렇다.

단지 본능을 이성으로 얼마나 통제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스카이캐슬의 예를 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사람이, 특히 학부모는 그렇다는 것을 경험해봐서 안다.

교육자는 이런 엄청난 장벽을 넘어야 하는데 그것은 예사로 힘든 일이 아니다.

사실 사람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려 17년이고 대학원이라도 진학하면 20년 이상을 학교에서 보낸다. 사람구실하기가 그리도 힘든 것일까 생각해 보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교육으로 사람을 만드는 게 사실이라면 초등학교도 안 나온 어른들의 지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야 하는데 대체로 그분들은 지혜롭다. 저절로 깨우치는 것은 교육 축에도 들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인간들의 오만이다.

더구나 서울대를 나와야 행복한 건가 생각해 봐도 그것 역시 그렇지도 않다.

주변에 서울대를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지만 다들 행복에 겨워 살아가고 있다. 정작 부모 자신은 일류대에 못 갔으면서 왜 그리도 아이들은 일류대에 가야 한다며 청춘의 시간을 통째로 구속하는 것일까.

사교육비를 벌기 위해 부모가 가정을 비우는 사이, 오히려 아이들은 사랑에 결핍되어 가면서 마음은 피폐해진다.

학부모들도 이 사실을 다 알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아픔이다.

본능은 전혀 퇴화하지 않은 것일까? 꼬리뼈가 남아 있듯이 동물적인 보호 본능은 태고의 그대로 우리들의 깊은 어딘가에 화석처럼 층층이 쌓여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교사들이 아이들을 독립적이고 강하게 교육하는 일은 힘들고 버겁다.

나도 학부모 시절에는 그렇게 혼란스러웠고 교사 시절에는 힘겨워했다.

부모는 같이 가라 하고 학부모는 앞서가라 합니다.

부모는 큰 꿈을 꾸라 하고 학부모는 꿈꿀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부모는 멀리 보라하고 학부모는 앞만 보라 합니다.

부모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참된 교육의 시작입니다.(공익광고 카피)

학교는 마땅히 학부모의 기대를 이해해야 하고

학부모는 마땅히 교육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자식 둘을 다 키웠고 교직계도 은퇴한 내가

이렇게 장대한 권유를 하는 것은 때가 너무 늦어서 볼품이 없으나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변함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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