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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는 살인자, 미세먼지로 매년 900만 명 죽어
소리없는 살인자, 미세먼지로 매년 900만 명 죽어
  • 윤양원
  • 승인 2019.01.18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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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의 정치·경제학을 논하다

 

거제시민에너지협동조합 윤양원 상임이사

영국의 저명한 의학 전문지인 'Lancet'에 따르면, 2015년 한 해 환경오염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의 수가 전 세계적으로 900만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이중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650만 명에 달해,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의 원인은 대부분 나빠진 공기질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별론 인도의 사망자 수가 250만 명으로 1위를 차지했고, 그 다음은 중국으로 158만 명이 2015년 한 해 동안 대기오염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고, 사망의 주원인은 심장병과 호흡기 질환, 그리고 폐질환과 폐암 등으로 알려졌다.

 

한반도 대기질 이미 위험수위 넘어서

최근 중국발 미세먼지에 의한 한반도의 공기질 문제가 주요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세계 유수의 의학기관들이 대기질 오염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보고서를 속속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나빠진 대기질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 확실하고도 즉각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최근 우리 정부는 경유차에 대한 지원정책 철회와 석탄화력발전소의 출력저감 등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으나, 사실상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것이 다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 이유는 한반도의 대기오염 문제가 국내의 원인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닌 때문이다.

 

미세먼지의 절반 이상은 ‘중국발’

한반도 대기오염의 원인 중 중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절반 이상이란 사실을 부인하는 나라는 중국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중국발 미세먼지를 간단히(?) 제거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문제의 정치·경제학적 복잡성에 있다.

냉혹한 힘의 논리만 작용하는 국제 정치학의 세계에서 한 나라가 상대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대화와 설득을 통해 이끌어낸다는 건 사실상 무망(無望)한 일이다.

하물며 그 사안이 해당 국가의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될 일이라면, 현실적으로 당사자들끼리의 협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실익도 없이 헛힘만 쏟는 일일 가능성이 높다.

입장을 바꿔 일본이 미세먼지를 이유로 우리에게 석탄화력발전을 중단하고 자동차 운행을 줄이라 요구한다면 과연 우리는 그것을 수용할 수 있겠는가?

 

단일화된 세계경제 속에선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어

중국은 우리 경제의 성장에 있어 배제할 수 없는 대상국이 된지 오래다. 수출 비중 25.1%(‘16년 기준), 수입비중 21.4%를 차지하는 부동의 제1 교역 상대국이다.

 

자료출처 : KOTRA

 

따라서 중국의 경제성장이 곧 우리의 경제에 미칠 막대한 영향을 생각한다면, 사실상 미세먼지를 이유로 그들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물론 사드사태 때보다 수십 배 쯤 더한 중국의 경제보복을 감수하고, 거기에 국내 경기의 후퇴와 남북 핵협상 테이블에서 중국의 비토를 감내하면서까지 일전(一戰)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다면 못할 이유도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에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단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중국에 중간재를 수출하고 그들로부터 저렴한 공산품과 여타의 재화를 수입한다.

그래서 그들이 대기오염을 막기 위해 저렴한(?, 물론 비경제적 외부효과를 감안하면 결코 저렴하지 않지만) 석탄화력발전 대신 천연가스와 신재생에너지 사용의 비중을 극적으로 늘리고, 일시에 전반적 에너지믹스의 전환을 결행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비싼 중국산 제품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자동차운행을 줄인다면 현지에 진출한 우리 자동차 회사의 매출은 줄어들 것이고, 동시에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비롯한 각종 부품들에 대한 우리의 수출은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 국민 중 누가 그 결과를 기꺼이 수용할 것이며, 또 누가 그런 정부의 결의에 찬 일전(?, 一戰)을 위해 자신의 일자리와 월급을 담보잡히겠는가?

그래서 중국을 향해 큰소리치지 못하는 정부를 향한 비난은 사실상 강자를 향한 약자의 허울 좋은 넋두리고,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분열적 상황에 대한 슬픈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공유지의 비극’엔 출구전략이 없나?

이처럼 국가 간 이해관계의 충돌이 정치·경제학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돌아가는 문제를 일거에 해소할 묘책이란 사실상 없다. 특히 대기오염처럼 공유지를 두고 벌어지는 국가 간 이해관계의 충돌은 더더욱 그렇다.

미국의 생물학자인 G. J. 하딘은 이런 상황을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commons)'이란 테제(These)를 들어 설명한다.

한정된 목초지를 두고 여러 명의 목동들이 경쟁할 때, 이 초지를 지속가능하게 관리하기 위해선 각자가 가진 소들 전부가 아닌 일부만을 방목할 수밖에 없다.

만약 모든 목동이 소 한 마리씩만 이 초지에 방목하기로 약속해놓고, 그 중 한 목동이 약속을 어기고 서너 마리를 방목하면, 결과적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 마리의 소만 방목한 모든 목동은 기회비용의 손실을 입게 된다.

그래서 모든 목동이 자신이 가진 소를 전부 방목하면 결국 그 초지는 순식간에 황무지로 변하고 만다. 초지가 재생되는 속도보다 소들에 의해 소비되는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목동은 이 초지에선 한 마리의 소도 키울 수 없게 된다.

이것이 하딘이 주목한 공유지를 두고 벌어지는 비극적 경쟁의 결과다.

‘깨끗한 공기’란 공유지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동북아의 상황 역시 하딘이 지적한 ‘공유지의 비극’의 전형이다.

 

대기오염은 경제성장을 향한 인간 욕망의 산물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소비를 통해 성장한다. 그래서 소비 없는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언어적 모순이다. 하지만 성장을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성장의 산물보다 크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익보다 비용이 더 큰 경제는 사실상 비(非)경제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처럼 떠받들고 있는 시장 자본주의의 대전제는 한정된 자연자본이란 공유지를 만날 때 여지없이 무너진다.

산업혁명 이전과 비교해 세계의 인구는 약 열 배 늘어나는 데 그친 반면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총량은 백 배 이상 증가했다. 그래서 자연자본의 소비 속도로만 따진다면 21세기 현생 인류에게 있어 1년은 산업혁명 이전의 1,000년과 맞먹는다.

지구의 생성 이래 이런 정도의 소비속도는 이례적이며, 산술적으로도 이런 속도는 자연자본의 재생능력에 비례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게 다수 생태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구온난화와 대기오염, 그리고 미세플라스틱을 비롯한 각종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가 단순한 일상의 불편 정도로 그칠 수 없는 이유다.

 

'성장의 한계’에 대한 인식 없으면 돌파구도 없어

세계은행에 따르면 대기오염으로 인한 인도의 생산성 손실이 GDP의 0.4%에 달하며, 오염이 심한 중·저소득 국가의 연간 의료비 지출의 7%가 환경오염으로 인한 것이라 한다.

물론 이는 기후변화로 인한 각종 재해비용이 제외된 수치임을 감안할 때, 향후 인도의 경제성장이 자국 국민들을 비롯한 주변국의 생존에 끼칠 막대한 피해를 일정부분 예상 가능케 한다.

지난 20년 동안 중국이 맡았던 세계의 공장 역할이 이제 인도로 넘어가고 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급격한 성장속도 하락이 보여주듯 인도 역시 그 역할이 끝나면 중국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인도의 성장은 중국의 그것만큼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게 생태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판단이다. 왜냐하면 지구엔 인도의 성장을 뒷받침할 만한 자연자본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문제는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인도란 거대한 세계의 공장이 가동될 동안 우리가 겪어야 할 전(全)지구적 환경재앙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인 세르주 라투슈는 저서인 ‘탈성장 사회’를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은 언어 자체로 모순이다“고 말했다.

그렇다. 생명을 가진 모든 개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生)과 사(死)의 윤회적(輪回的) 고리 속에서 명멸(明滅)을 거듭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끝없는 성장의 환상에서 탈피하지 못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디스토피아(dystopia)일 수밖에 없다.

지구는 유한한 공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이면서 동시에 ‘호모 사피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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