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기고)김백일 동상은 거제시민의 치욕
(기고)김백일 동상은 거제시민의 치욕
  • 김동성
  • 승인 2018.11.04 2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친일김백일동상철거를위한 거제범시민대책위 사무국장 김동성

해방이 되고 1945년 8월 26일 간도특설대 부대해체식에 참석하고 고향 함경북도 명천으로 돌아갔던 김찬규는,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도 홀로 반공에 입각하여 청천백일과 같이 살겠다’며 이름을 김백일로 개명하고 남쪽으로 향했다. 마치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결단인양 위장했지만 독립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민족반역자가 살아남기 위해 벌인 비열한 기만이었고, 과거 그가 목숨바쳐 지키고자 했던 민족과 국가는 분명 일본제국 이었다.

1917년 함북 명천 태생인 김백일(본명 김찬규)은 일본이 1931년 만주침략의 승리로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의 장교양성기관인 봉천군관학교에 1936년 입학하고 이듬해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1938년 간도(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항일독립군에 대한 첩보수집과 토벌을 목적으로 하는 ‘간도특설대’설립에 참여했고, 해방이 될 때까지 장교로서 활동했다. 간도특설대는 항일독립군 172명을 살해 했을뿐만 아니라 민간인에게 까지 고문,구타,방화,강간,약탈을 자행했다. 그들은 항일무장독립군은 물론이고 독립군에게 동조,소통한 민간인에 까지 온갖 잔혹한 행위를 일삼아 가는곳 마다 악명을 떨쳤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김백일은 1943년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장(훈5위경운장)을 받기도 했다.

해방후, 간도특설대에 함께 참여했던 백선엽등과 월남한 김백일은 곧바로 국방경비대 3연대장으로,이어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준장계급으로 제1군단장을 맏기도 했으며 1950년말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군을 설득해 피난민을 수용한 공이 있는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후 38선 이남을 통치한 미 군정과, 1948년 수립된 이승만 정부에서 친일행적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탄압하고 일신의 영달을 누렸던 이들이 다시 국가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오직 반공을 내세우면 그어떤 반민족행위도 용서가 되어. 항일독립군의 가슴에 총을 겨눴던 김백일같은 민족반역자들이 대부분 국가요직을 장악하고 민중위에 군림하는 능욕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불과 2년전 국가기능을 마비시키고 모든 국민을 철저하게 기만했던 박근혜정권의 국정농단사태가 가능할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경제규모 세계 10위권 이라지만 빈부격차는 갈수록 확대 되고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극도로 위협받는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살게된 연유가 따로있을까. 잘못된 역사를 바로세우지 못하고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011년 대부분의 거제시민의 뜻을 무시하고 시민의 공공시설에 김백일 동상이 기습적으로 세워졌다. 참으로 시대착오적이고 치욕스런 사건이 아닐수 없다. 당시 법원의 판결을 들어 동상철거를 난망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있지만, 법원의 판결은 거제시의 행정의 잘못에 대한 판결일뿐 김백일동상 설치의 정당성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김백일동상 설치 승인과정에서 문화재영향검토를 거치지 않은 거제시에 근본적 문제가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거제시는 이제라도 그 잘못을 인정하고 거제시민에게 사과해야 하며 김백일동상을 철거하기위해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불과 두달도 채 남지않은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반민족행위자 김백일의 동상을 버젓이 세워두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숨져간 수많은 영령들을 추모한다면, 두고두고 지탄과 비웃음의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어린 학생들이 이에대해 묻는다면 무어라 답하겠는가. 사람을 죽여도,민족을 위해 목숨바쳐 싸운 독립군을 학살했어도 공을 세우면 용서가 되고 동상도 세워준다고 대답하려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