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뉴스
(시를 걷는 오늘) 19, 이지령의 담쟁이
(시를 걷는 오늘) 19, 이지령의 담쟁이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8.06.20 11: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지령 ‘담쟁이’

 

길을 잃어버렸던 기억 푸르게 자라와요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다 절벽을 부여잡았지요 창백이 지나쳐 푸름이 되었

던 기억이 볕바른 양지에 손도장을 찍어요 우리가 남긴 손도

장이 외로운 길 더듬어 갈 때 함께는 간절한 그대의 배경에

서 환하지요 공존하는 푸른 이정표가 긍정의 긍정으로 꿈틀

거려요 비빌 언덕이란 얼마나 든든한가요 척척 받아주며 푸

르게 타오르라는 눈빛에서 푸름을 읽고 다시 길을 가요 말없

이 받아주던 등짝을 최초로 기억할 뿐이지요 온몸으로 기어

야 하는 슬픈 유전, 푸른 손도장이 침묵 가운데 간절히 가네

요 뼈를 녹여 기어가는 슬픈 유전을 묵묵히 초원을 꿈꾸라

했던 그대 등이 그리워요

울이며 담이 된 그대

몸이며 맘이 된 그대

시집〈구체적인 당신〉중에서

-------------------------------------------------------------------------

(감상)

혼자 일어설 수 없는 담쟁이는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인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갈 곳을 몰라 서성이는 담쟁이에게 벽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등을 내민다.

담쟁이는 그곳이 절벽인 줄을 모르고 볕바른 양지에 손도장을 찍으며 옆으로 위로 뻗어 나간다. 비록 외로운 길을 더듬어가지만 간절함이 있어 환하다. 벽과 담쟁이는 서로 공존하는 푸른 이정표를 지니게 된다. 푸른 이정표는 긍정의 긍정으로 꿈틀댄다.

담쟁이에게 있어 벽이란 비빌 언덕이며 든든하게 의지할 수 있는 곳이다. 그 벽이 직각의 절벽이란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오직 푸르게 타오르라는 절벽의 눈빛만을 기억한다. 최초로 자신을 받아 주었던 넓은 등짝에 기댄다. 뼈 없는 자신의 슬픈 유전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침묵 가운데 간절함으로 초원을 꿈꾸고 있을 뿐이다.

담쟁이는 나약한 우리 자신의 다른 표현인 것만 같다. 기대지 않고는 혼자 일어서기에 벅찬 사람들. ‘울이며 담이 된 그대’와 ‘몸이며 맘이 된 그대’ 덕분에 한 생을 긍정의 빛으로 살아 갈 수 있지 않을까. 길을 잃어버렸을 때 어느 시인은 “마음의 북극성을 따라 가라”고 했다. 그러나 이지령 시인은 누군가가 내밀어 주는 등에 기대어 함께 공존하는 긍정의 긍정으로 볕바른 양지를 찾아 더 높이 더 푸르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라고 한다. 돌담에 무성하던 담쟁이의 푸름처럼 작가의 삶도 더 푸르고 밝아졌으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혼자 길을 잃고 서성일 때는 최초의 등짝을 내밀었던 그 든든한 누군가를 떠올릴 일이다. 그리하여 그 등에 기대어 자신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기를 기대해본다. 함께 공존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길인 것이다. 초록이 눈부시다./김영미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