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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통영에서 첫 독립투쟁 일어나
1907년 통영에서 첫 독립투쟁 일어나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4.06.23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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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통영의 첫 민중봉기

▲ 1907년 해산 직전 대한제국 신식 군대가 통영 강구에서 사열하는 모습(통영군안내, 1915년)

“진남군의 시민들이 일본의 침학(侵虐, 침범해 포학하게 행동함)을 견디지 못해 일어나 무기를 들고 싸워 일본인 수십 명을 살상하고 그들의 집을 불 질렀다. 일본군은 부산과 창원에서 군사를 파병해 진압하도록 하니 경남도 연해가 크게 시끄러웠다(『매천야록』, 권5, 융희원년 정미).”

매헌 황현은 1907년 진남군(지금의 통영시)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를 짧게 설명했다. 러일전쟁 이후 한국은 일본과의 을사늑약(1905) 체결에 따라 외교권을 강제적으로 빼앗겼다. 이어서 통감부가 한국의 정치 및 자치권마저 거머쥐고 통제했다. 그 다음으로 나온 게 1907년 6월 22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군대를 해산당하고 말았다.

통영시는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중요한 군사도시였다. 갑오개혁에 따라 통제영은 1896년 5월 진남진위대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통제영 시기 군인들의 봉급은 거제, 진해, 가덕도 황실 어장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충당했다. 폐지된 통제영 소관 어장은 정부 관리 또는 유명한 지역 유지에게 넘겨졌다. 일본인 자본가는 진해만 일대의 알짜배기 어장을 대부 받았다. 일반인들은 어장 하나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1904년 3월 일본군은 한산도에 포대를 설치하고 일정한 규모의 군인을 주둔시켰다. 1906년 5월 일본군은 군용지의 확장에 따라 마구잡이로 땅을 침범해 몰수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은 옛 통영제 관할 중요한 어장까지 마구 침범해 물고기마저 약탈하고 있었다. 통영인민들은 우리 군대가 해산되어 지켜 주지도 못한다는 울분이 터져 나왔다. 이게 바로 ‘일본의 참학’이 아니고 무엇인가.


군대 해산 직후 진위대 제4연대 제2대대(진남) 대원 80명은 1907년 7월 25일 무전·정량·문화동 일대에 거주하던 일본 이주자들과 충돌했다. 이 소식을 접한 진남경찰서 일본인 경부 이하 순검, 순사 12명이 한국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이를 보던 수백명의 진남군민은 한국군과 합세해 일본인 집을 돌로 쳐서 부수고 일본인들을 내쫓았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5명이 부상을 입었다.


다급해진 일인 경찰은 마산주재 일본영사관 내의 일본군 10명과 순사 40명을 급파했다. 7월 26일 밤 부산경찰서 소속 헌병 15명과 마산경찰서 순사 10명을 추가로 내려 보냈다. 일본군과 경찰 75명은 한국군과 군민과 혈투를 예고하고 있었다.


경상남도 관찰사 김사묵은 대한제국 내부(內部)에 “진남군 인민이 일인으로 더불어 소요를 일으키니 곧 금지시켜 달라”고 전보를 보냈다. 대한제국이나 일본은 진남군 인민의 봉기를 ‘소요(騷擾)’ 또는 ‘요란(擾亂)’이라고 폄하하고 ‘진압’에 나섰다. 우리 정부의 관리들은 일본에 저항하는 자국민을 ‘폭도’가 일으킨 ‘소요’라고 지칭했다. 실제 일본은 해산 한국군과 인민을 ‘폭도’라고 불렀고 잔인하게 학살했음이다.


이 봉기는 독립전쟁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 전쟁은 1909년 9월까지 전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일부 생존한 의병들은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해군은 1909년 9월 1∼9일까지 통영 내의 한산도, 욕지도, 비진도, 저도 등지에서 의병들을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상당수 의병들은 고성과 사천 지역으로 빠져 나가 활동했는데 주로 독립단체를 결성했다.


일제의 침략에 처음으로 저항한 통영지역 군인과 인민들은 구식 총과 농기구, 죽창에 지나지 않았다. 지역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떨쳐 일어난 독립운동가들은 제국주의 전쟁에서 말이나 글 보다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쟁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패전을 거든한 옛 한국군은 일제의 막강한 군사력과 무기들 앞에서 절망하지 않았다. 이들은 드넓은 만주에서, 소련 인근 국경에서, 백두산에서, 통영과 고성 등지에서 일제 군인과 싸워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독립전쟁에 참여한 인민들이 있다면 반대로 일본군에 들어가 장교나 사병이 된 엘리트가 있었다. 이들 엘리트들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고문하고 학살했다. 그 중 일부는 일제에 붙어 호가호식하면서 훈장도 받고 해방된 조선에서 군 장교나 정치가로서 변신했다. 이 사실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임을 간과할 수 없다.

▲ 1907년 해산 직전 대한제국 신식 군대가 통영 강구에서 사열하는 모습(통영군안내, 19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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