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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걷는 오늘>8 '족보'
<시를걷는 오늘>8 '족보'
  • 거제통영오늘신문
  • 승인 2018.03.2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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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인수 시인

이한걸 시인의 시 <족보>를 읽고 

족보란 한 씨족(동족)의 계통을 기록한 책이다. 이때 씨족이란 성(姓)과 본관(本貫)이 같아서 동조의식(同祖意識)을 가진 남계친족(男系親族)을 가리킨다. 즉 부계중심의 기록이 족보인 셈이다. 어쩌면 족보는 호주제가 폐지된 후 가부장적 질서를 고집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법전인지도 모르겠다.
이한걸 시인의 시 <족보>는 시대의 변화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이한걸 시인의 시에서 말하는 족보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같은 성을 사용하는 동족의 연대기가 아니다. 그것은 땀의 연대기요, 노동의 연대기다.
시인은 1연에서 “할아버지는 / 농사지으며 목수일 했고 / 아버지는 / 농사지으며 미장일 했고 / 나는 공장 노동자”라고 노래한다. 여기서 멈추었으면 시인의 족보는 땀의 연대기이긴 하나 ‘할아버지 - 아버지 - 나’에 이르는 부계중심의 연대기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의 인식은 2연에서 “아내도 공장 나가고 / 딸도 공장 나가고 / 아들도 공장 나가고” 라는 데로 이른다. 시인은 땀의 연대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남성과 여성과 아들과 딸의 공동 연대기로 나아가 있다. 즉 시인은 나와 아내와 아들과 딸을 족보에 동등하게 올려놓았다.
나와 아내와 딸과 아들을 대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인의 인식은 마지막 연에 이르면 더욱 분명해진다. “어쩌다 다 같이 쉬는 일요일 / 길고 긴 옥상 빨랫줄엔 / 빛깔 다른 작업복 /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라고 노래하며, 모든 땀들을 한데 어우르고 씻어낸다.
상상해보라! 남편과 아내의 작업복이, 딸과 아들의 작업복이 바람에 날리며 땀을 씻어내는 모습을. 긴 빨래줄 가운데 높이 세운 장대 옆으로 늘어선 서로 다른 빛깔의 작업복이 어우러진 모습을. 이 땀의 족보, 노동의 족보가 민중의 족보다.


족보


이한걸

할아버지는
농사지으며 목수일 했고
아버지는
농사지으며 미장일 했고
나는 공장 노동자

아내도 공장 나가고
딸도 공장 나가고
아들도 공장 나가고

어쩌다 다 같이 쉬는 일요일
길고 긴 옥상 빨랫줄엔
빛깔 다른 작업복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

 

 

이한걸 시인의 시집 『족보』에서 <족보> 전문인용(全文引用)

*첫 문단의 족보에 대한 개념은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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